한겨레신문, 1990년 11월 10일자. 태권도 실업팀 창단열기.

1960년대 초 태권도의 영역이 무도에서 스포츠로 확장되면서 겨루기 선수들을 육성하는 학교 태권도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1980년대가 되자 직장 개념의 일반부 태권도 실업팀 창단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태권도 경기화가 추진된 지 20년이 지나면서 태권도 선수들의 취업과 사회진출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이다.

1983년 ㈜설악케이블카와 ㈜한국스포츠가 태권도 실업팀을 만들어 소속 선수들을 대회에 참가시켰다. 한국스포츠는 1983년 성동상고 졸업생들이 ‘성동OB팀’으로 대회에 참가할 때 후원했는데, 당시 부장은 이상일, 감독은 임성근, 코치는 조남수, 선수는 하용성·윤준철·김한노·오배균·길현덕·장승화였다. 하지만 설악케이블카와 한국스포츠는 실업팀다운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 얼마 못 가 유명무실해졌다.

1983년 한국스포츠가 성동상전 졸업생들로 성동OB팀을 만들어 대회에 참가했다. 사진=대한태권도협회 1983년 7월호 태권도지.

1986년 7월, 미국 코로라도 스프링스에서 열린 제1회 월드컵태권도대회를 취재한 노기창(한국일보)은 태권도 실업팀 부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태권도장의 유치원화를 막고 국기로서 세계 속으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실업팀 창단이 시급하다. 우리나라는 실업팀이 없기 때문에 선수들이 일찍 은퇴해 단명을 보여준다. 보다 원숙한 경기의 기량을 과시할 틈도 없이 선수생활을 끝내버리는 것은 태권도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많은 기업인들이 체육단체에 책임을 맡아 적지 않은 기금을 내놓고 있지만 국기 태권도에는 한 푼도 내놓지 않은 현실도 생각할 문제다. 태권도인과 체육 당국은 머리를 맞대고 국기 태권도 발전을 위해 좋은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 <대한태권도협회. 태권도. 1986년 9월호.>

1980년대 중반, 제천시청-서울지하철공사-현대자동차 등 창단

이 같은 염원이 반영되었을까. 1986년 제천시청이 이동준·한재구·임관인·연규현을 주축으로 실업팀을 창단한 데 이어 같은 해 서울지하철공사도 실업팀을 창단했다. 당시 서울지하철공사는 직장들이 모여 태권도를 수련해 눈길을 끌었다. 1986년 8월 600여 명의 회원들이 모여 태권도회를 창단했다. 그 해 10월 국기원에서 열린 제1회 추계종별태권도선수권대회에 지하철공사 9명의 선수가 처음으로 참가했다. 지하철공사는 이 대회를 통해 우수선수를 스카우트 하는 등 정식 실업팀 창단의 디딤돌을 마련했다.

그 후 88년 현대자동차, 89년 현대정공이 연이어 실업팀을 창단하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소속팀을 갖지 못해 은퇴하려고 하는 선수들에게 계속 현역 선수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일반부 활성화와 지도자 및 선수들의 일자리 창출 등 긍정적인 효과를 낳았다.

현대자동차는 1973년 태권도클럽을 발족해 1983년까지 지속되다가 잠시 중단되었지만 1987년 10월 회사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10평의 태권도 전용체육관이 완공되면서 태권도클럽이 다시 재건됐다.

그 후 1988년 3월 시설관리부 사원 김종관을 감독, 문상훈을 코치로 지도체제를 구성한 후 국가대표 선수 출신들을 주축으로 팀을 창단됐다. 창단 멤버는 플라이급 이창석· 밴텀급 유명식· 페더급 허현배·월터급 한재구·헤비급 임재억이었고, 미들급 정용석과 헤비급 김용수가 입단할 예정이다. 현재자동차 실업팀은 오전에 선수들을 근무부서에 실무 배치해 업무를 수행하도록 함으로써 직장인으로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놓아 이상적인 실업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대한태권도협회. 태권도. 1988년 12월호.>

㈜현대정공은 1988년 12월 태권도부 발대식을 갖고 코치 겸 선수에 김병삼을 비롯해 윤희준·조희진·김선백 3명의 선수를 스카우트했다. 이들은 현대정공 총무부 정식 직원으로 오전 근무가 끝나면 오후부터 선수로서 기량을 갈고 닦았다. <대한태권도협회. 태권도. 1989년 6월호.>

한편 1990년이 되자 중앙투자신탁이 처음으로 여성 태권도 실업팀 창단을 준비했고, 조선맥주와 대전동구청, 보령군청도 창단을 위한 우수선수 모집을 벌였다. 1990년 11월 11일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조선맥주는 선수 모집에 월 52만 원, 상여금 600% 조건을 제시했다.

1990년대 중반, 삼성·가스공사 등 태권도실업팀 창단 붐

1994년 9월 4일 하계올림픽에 태권도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됐지만 국내 태권도 실업팀은 침체의 늪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서울지하철공사를 제외한 나머지 6∼7개 실업팀은 실업팀의 면모를 제대로 갖췄다고 볼 수 없었다.

그러다 1996년 보성주택·대한통운·진로가 태권도 실업팀을 창단하자 태권도계가 반색했다. 대한태권도협회 관계자는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뒤 상당수 기업에서 태권도팀 창단을 검토하고 있다. 협회 집행부도 팀 창단에 신경 쓰고 있고, 태권도성전 건립 등 중장기 발전 대책이 속속 수립되고 있어 내년 상반기까지 4∼5개사가 실업팀을 창단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경향신문. 1996년 12월 13일.> .

대구·경북을 연고로 한 보성주택 태권도 실업팀은 국가대표 선수 출신 서성교를 코치로 선임하고 6명의 우수 선수를 스카우트했다. 선수단은 대구에 숙소를 마련하고, 훈련은 주로 계명대체육관에서 했다.

진로그룹도 1996년 상반기에 태권도 실업팀을 출범시키기 위해 정국현을 코치로 선임하고 우수 선수 스카우트에 힘을 쏟았다. 1980년대 4번 연속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챔피언을 지낸 정국현은 “기업에서 실업팀을 창단하는 만큼 무엇보다도 선수들이 직업 선수로서 프로 근성이 있어야 한다”고 남다른 각오를 밝혔다. 하지만 진로 실업팀은 1997년 진로그룹이 매각되면서 연간 10억 원으로 운영하던 팀을 해체했다.

이런 흐름 속에 1997년 1월, 삼성그룹은 서울 라마다 르네상스호텔에서 태권도단 창단식을 갖고 각종 대회에 참가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로써 삼성은 그룹 임원 이필곤이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으로 취임한 지 1년 만에 태권도팀을 창단하겠다는 공약을 지켰다.

1997년 1월 공식 창단한 삼성물산 태권도단. 그 후 삼성에스원 태권도단으로 개칭했다. 사진=대한태권도협회 1997년 3월호 태권도지.

 

창단 감독에 SBS TV 태권도 해설위원이자 전 한국대표팀 코치를 지낸 김세혁을 선임하고, 팀 운영은 삼성물산 건설부문에서 맡기로 했다. 삼성물산 태권도단은 1999년 2월 삼성계열 경비전문업체인 삼성에스원으로 명칭을 바꾸고 김제경·김병욱·정명숙 등 대표팀 주축 선수를 포함한 14명 선수와 3명의 코치들을 영입해 재출범했다.

1997년 7월에는 한국가스공사가 실업팀을 창단했다. 정부투자기관 한국가스공사는 1천여 명의 직원들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통해 태권도 실업팀을 창단해 눈길을 끌었다. 태권도 실업팀은 빙상 실업팀에 밀려 2위를 했지만 임원들은 여론결과를 토대로 회사의 한정된 예산(1년 6억 5천만 원)과 공기업 이미지에 걸맞은 종목을 찾다가 비인기종목이지만 남자 태권도 실업팀과 여자 핸드볼 실업팀을 창단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단장 신종승은 이렇게 말했다.

1997년 7월 공식 창단식을 가진 한국가스공사 태권도단. 사진=대한태권도협회 1997년 8월호 태권도지.

“솔직히 태권도는 비인기 종목으로 기업 홍보차원에서는 보다 좋은 조건을 가진 다른 종목을 고려해 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가스공사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기업으로서 대중적인 인기는 그다지 누리지 못한 태권도에 대해 공기업으로 가지는 국가적, 사회적 책임감이란 차원에서 태권도를 창단하게 된 것입니다. 또 현실적으로 오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점차 그 대중성과 인기도 상승이 큰 태권도가 더 발전 가능성이 있는 것은 자명하다고 봅니다.”<대한태권도협회. 태권도. 1997년 8월호.>

한국가스공사 실업팀은 대표팀 코치로 활동한 주신규가 감독, 신재근이 코치을 맡아 진승태·김천규·심기선·장대순·이임수·강동국·김정규 등 국가대표급 선수 7명과 첫 출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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