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부터 이어진 화랑과 태권도 연계 논리 재고해야
‘용감한 무사’ ‘충효 청년’ 화랑 이미지, 태권도에 덧씌워
민족주의-국가관 강조한 일본 군국주의 무도교육과 비슷

#복원된 불국사는 통일신라 시대 건축양식인가?
우리나라 건축문화유산의 대명사인 경주 불국사는 751년(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창건했다. 문헌자료에 의하면 원래의 불국사는 그 규모가 현재의 8배인 2000여 칸에 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1970년대 초에 복원된 불국사는 통일신라의 건축일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불국사 대웅전과 무설전 등 주요 전각은 고려·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뒤섞은 건축물들이라는 것이다.

문화재 복원의 사전적 의미는 ‘본디 형상대로 회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건축분야의 한 관계자는 “복원은 아무리 원형에 충실하다고 해도 결국은 현대의 창조물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대로라면 불국사의 터는 통일 신라 때 그 곳이지만, 건물은 1970∼73년 복원할 당시 장인들이 상상력을 발휘해 만들었다는 말로도 해석된다. 실제로 불국사 복원에 대한 비사(秘史)가 공개되면서 현재의 불국사는 통일신라의 건축양식이 아니라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것은 불국사 복원의 이면에는 ‘민족정기 회복’을 앞세운 박정희 정권의 저돌적인 문화유산 정책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당시 정권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통일신라 건축양식으로 포장된 가공의 건축물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유럽에서는 고건축의 실체가 확실히 규명될 때까지 복원을 미루고 후세에 그 과제를 넘기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실체가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복원을 하면 원형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건축물 복원은 그렇지 않았다. 충무공 이순신을 성웅(聖雄)으로 추앙하는 것처럼 불국사 복원도 ‘민족정기’를 내세워 가공했다.

#화랑과 태권도, 연관성 있을까?
화랑(花郞)도 마찬가지다. 신라시대 엘리트 청년 무사집단인 화랑도 민족정기-민족정신 고취에서 비롯됐다. 화랑들이 명산대천을 순례하면서 무술을 연마하고 심신을 수양하며 진취적인 기상을 달고 닦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화랑을 태권도와 연관시키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 화랑과 태권도를 관련지은 것은 1970년대 초다. 1970년대 문교부가 발간한 『체육자료 총서』와 국기원이 발간한 『태권도 교본』을 보면 화랑과 태권도의 연관성을 언급하고 있다.

화랑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역사학자는 단재 신채호(申采浩)였다. 그는 화랑을 뛰어난 무사(武士)이자 우리 민족정신의 화신(化身)으로 보았다. 민족주의 국학자 안확은 『조선무사영웅전』(1919)에서 “살생유택으로 표현되는 관인(寬仁)의 정신, 그리고 충신(忠信)의 정신을 기반으로 한 화랑도라는 이름의 우리 고유의 무사도는 서양의 기사도보다도 훨씬 뛰어나다”며 화랑들을 찬양했다.

그 후 화랑이 ‘한민족의 위대한 청년문화’로 떠오른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1950년 중반부터다. 전쟁을 겪으면서 청년의 애국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육군본부 정훈감이었던 이선근 대령(훗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에게 한국사에서 청년문화의 유산을 발굴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이 대령이 지체없이 『화랑도연구』(1954)를 펴내면서 화랑은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청년문화의 유산으로 인식됐고, 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호국(護國)의 꽃으로 일컬어지게 됐다.

이처럼 민족문화론을 바탕으로 삼은 관용(官用) 사학은 화랑정신을 윤관과 묘청뿐만 아니라 3·1 운동의 정신에까지 연관시키고, 여기서 더 나아가 ‘애국·멸공 정신’의 구심점인 육군사관학교 소재지를 ‘화랑대’로 칭했다. 박정희 정권과 유착한 학자들은 화랑을 신라통일의 주역으로 내세우며 ‘화랑정신’을 ’10월 유신정신’으로 승화하기도 했다.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닫던 시절, 일본의 근대 교육은 철저히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이뤄졌다. ‘근대 국민 만들기’라는 명목 아래 소풍도 군사교련처럼 실시했고, 무도교육이 강화됐다. 1970년대 우리나라 교육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풍조는 태권도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 출간된『태권도교본』을 보면 태권도의 역사와 정신이 마치 화랑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처럼 기술되어 있다. 이런 영향 때문에 ‘화랑=태권도’로 인식됐고, 그 당시 청년들의 생활규범이었던 세속오계가 태권도정신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경주와 진천 등 화랑과 관련있는 지역은 태권도 발상지, 태권도 본향이라고 할 정도다.

#화랑과 태권도 관련짓는 ‘견강부회(牽强附會)’ 사라져야
1970년대 군사정권에 의해 확고한 국가관과 민족우월주의가 팽배해지면서 태권도는 일본 가라테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 민족정기를 심어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화랑=태권도’를 확장시켰다. 1970년대 초 태권도교본 발간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종우 원로(전 국기원 부원장)는 “태권도 세계화를 위해서 태권도 역사를 정립해야 하는데, 마땅히 내세울 것이 없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신라 화랑을 가져온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태권도의 역사는 한국 국가주의의 역사”라고 강조하고 있는 구효송 영산대 교수는 “일본 군국주의에 봉사했던 국가 중심의 무예관이 태권도에 그대로 이식됐고, 이는 반공정권과 군사정권을 거치며 민족주의적으로 포장됐다”고 지적한다. 그 당시 정권이 ‘용감한 무사’, ‘충효 청년’이라는 이미지를 화랑에 덧씌웠고, 태권도계도 이러한 화랑 이미지를 태권도에 이식시켰다.

무술에 일가견이 있는 황규경 변호사는 이렇게 강변한다.
“태권도가 신라 화랑이 배우던 무술이라는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 무술이란 이름을 내세우려는 욕심에 근거없는 주장을 버젓이 태권도나 합기도 책자나 협회 싸이트에 싣고 있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태권도나 기타 한국무술을 ‘화랑도’와 연결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를 언급해야만 한다고 믿는 것은 콤플렉스의 발로이거나 무지의 소치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화랑과 태권도를 억지로 관련짓는 ‘견강부회(牽强附會)’는 사라져야 한다. 민족-반공-국수주의 색채가 강하고 군사독재정권의 입맛에 따라 왜곡되어온 화랑이 어떻게 태권도의 기원과 정신이 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화랑과 태권도에 대한 실질적인 연구가 더 이뤄져야 한다. 결국 태권도 학자와 교수들이 해야 할 몫이다.

< 서성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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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

  1. 부끄러운 사실. ..
    공감하는 글의 내용입니다.
    역사인식의 오류는 또 있습니다. 품계에 관한 내용인데요. 차용한 품의 체계가 1품이 가장 높지만 태권도 띠의 체계에선 반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무지한 처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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