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跆拳道)’ 명칭은 1955년 발표된 후 10년이 지난 1965년 공식 명칭으로 확정됐다.

태권도는 ‘태권(跆拳)’과 ‘도(道)’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태권도의 개념을 논할 때, 흔히 ‘태권(跆拳)’은 손과 주먹, 발을 사용하는 맨손무술(사실적 개념)이고, ‘도(道)’는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 또는 인격 및 정신수양(규범적 개념)이라고 풀이한다.

#태권도 작명 배경과 과정

그렇다면, 1955년 최홍희는 왜 ‘태권(跆拳)’에 ‘도(道)’ 붙여 태권도라고 했을까. 우선 ‘태권도’를 작명한 배경과 과정을 살펴보자.

1954년 6월, 최홍희가 이끄는 29사단은 제주도를 떠나 육군본부직할의 제1군단에 배속됐다. 그 해 9월 29사단 창설 1주년 기념일이 강원도 설악산 부근의 부대에서 열렸다. 이날 창설 기념식에서 최홍희가 이끄는 사단 장병들이 무술연무시범을 선보였고, 이 광경을 이승만 대통령이 지켜봤다.

대통령은 연무시범을 보고 “저것이 우리나라에 옛날부터 있던 태껸이야. 이것으로 깨뜨렸지. 이것을 전군에 가르쳐야 해. 그 서양 사람들은 윗동이만 쓰는데, 발로 차면 빙그르르 주저앉을 게 아닌가”라고 말했다.<최홍희(2005). 태권도와 나. 155쪽.>

최홍희 부관이었던 남태희는 당시를 이렇게 증언한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당수도 시범을 하기 위해 흰 도복을 입고 장병들 앞에서 나설 때 흰 도복을 처음 본 다른 장병들은 낄낄대고 비웃었다. 당시 도복의 띠는 흰 띠, 자띠(적), 검은띠 밖에 없었지만 구분이 단순해서 청띠를 만들어서 메고 시연에 나섰다. 그리고 15분 당수도 시연을 하는 동안 이승만 대통령 단상에는 이형근 대장을 비롯해 최홍희 장군이 자리를 하고 있었으며 (…) 멀리 있는 단상에서 관람한 이대통령이 손으로 가리키며 저것은 무엇으로 격파했는지 묻자, 옆에 있던 최홍희 장군이 정권을 가르치며 대통령에게 당수(수도)가 아닌 정권으로 격파했다고 설명했다.”<정순천(2010). 남태희 원로의 한국 방문과 태권도 작명의 비밀. 네이버 지식in. 2010년 4월 2일.>

최홍희는 연무시범을 보고 이승만 대통령이 큰 관심을 보이며 ‘태껸’이라고 한 것에 적잖은 자극을 받았다. 그는 곧바로 부관 남태희를 불렀다. 가라테를 의미하는 ‘당수도’, ‘공수도’를 대체할만한 명칭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말했던 ‘태껸’ 발음은 그에게 일종의 ‘힌트’였다.

최홍희는 1967년 저술한 『태권도교본』에서 “지금까지 불려온 여러 명칭을 보면 ‘당수’, ‘공수’, ‘화수’, ‘권법’ 등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손(手)에만 치중한 명칭이다. 실은 손보다 3배의 위력을 가진 발(足)이 더 많이 사용될 뿐만 아니라 (…) 일제 36년 동안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손 치더라도 해방 후에도 정확한 명칭을 찾지 못하여 10년이란 세월이 지났다는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최홍희는 가라테를 의미하는 ‘당수도’, ‘공수도’라고 표기하고 칭하는 것에 대해 한심지사(寒心之事)라며 뒤늦게 울분을 토했다. 그리고 나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무술 작명을 시작한다.

2010년 태권도진흥재단을 방문한 남태희 원로가 기자의 제안으로 태권도를 한자로 쓰고 있다.

남태희의 증언을 보자.
“이승만 대통령에게 시범을 보인 날 최홍희 장군이 나와 같이 사단장실로 가자고 했다. 그래서 이 대통령이 이야기한 태껸을 옥편에서 찾아봤지만 없었다. 계속 옥편을 찾아보다가 ‘밟은 태(跆)’를 발견했다. 일단 태를 골라 놓고 그 다음 ‘껸’를 찾았지만 옥편에 없었다. ‘수(手)’자도 고려했지만 당수도, 공수도 등 색채가 진해서 손보다는 강한 ‘주먹 권(拳)’을 선택했다. 태껸과 태권은 발음도 비슷했다. 최 장군과 나는 ‘태권’이라는 명칭이 좋겠다고 결심했고, 명칭제정위원회를 통해 공론화하기 시작했다.”<대한태권도협회, 태권도. 2010년 6월호(165호).>

최홍희는 당시 자신을 지원하던 이형근의 힘을 빌려 사회 각계 저명인사들로 1955년 명칭제정위원회를 구성한 후 그들을 서울의 고급 음식점으로 초청해 회의를 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최홍희가 말문을 열었다. “지금 국내 도처에서 같은 무도를 놓고 당수, 공수, 권법 등 제각기 마음대로 명칭으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새로운 이름을 제정하기 위해 모였다”며 ‘태권’이라 고 이름 붙인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당수’, ‘공수’에 익숙해 있던 참석자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최홍희는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태(跆)’자는 발로 뛴다, 찬다, 밟는다를 의미하며 ‘권(拳)’자는 주먹이다. 주먹은 단순히 손을 폈다 쥐었다 하는 주먹이 아니라 여러 형태의 주먹으로 찌르고, 뚫고 혹은 때리는 무도행위를 뜻하는 주먹”이라고 설명하며 직접 시범을 했다.

‘태권’ 발음이 이승만 대통령이 말했던 ‘태껸’과 비슷한데다 “태권도는 일찍이 태껸이라는 이름으로…”라고 역사성을 거론하며 참석자들을 설득한 끝에 ‘태권’이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최홍희는 언제부터 ‘태권(跆拳)’에 ‘도(道)’를 붙여 ‘태권도(跆拳道)’라고 했을까? 여러 자료와 문헌을 봐도 최홍희는 처음부터 ‘태권+도’에 집착하지 않았다. ‘태권’과 ‘태권도’를 섞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명칭제정위원회 회의 내용을 보면 ‘최홍희 장군이 제안한 태권에 전적으로 찬성합니다’라는 내용이 이를 방증한다.

‘태권도’ 명칭은 이승만 대통령이 친필로 ‘태권도’ 휘호를 내린 후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됐다. 그 때가 1955년인지 1956년인지 여전히 논란거리지만, 최홍희는 “나는 이승만 대통령 경호관들에게 접근해 태권도는 새로운 무술이고 옛 무술인 택견(태껸)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리고 대통령에게 새로운 명칭을 사용할 수 있게 승인을 받도록 노력해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나는 이 대통령에게 ‘태권도’라는 새로운 명칭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라고 미국에서 간행되는 <태권도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태권도의 ‘도(道)’는 일본 무도 개념과 의미 반영

그렇다면 최홍희는 왜 ‘태권(跆拳)’에 ‘도(道)’를 붙이고, ‘도(道)’를 정신수양이라고 풀이했을까 ?최홍희는 1983년 출간한 『태권도 백과사전 1』에서 태권도의 ‘도(道)’에 대해 “도는 올바른 길, 즉 정신수양을 말함인데…”라고 했다.

최홍희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소학과 명심보감 등 ‘한학(漢學)’을 공부해서 한문학에 능통했고, 유교에 심취했다. 따라서 유교에서 강조하는 군자의 도덕적인 측면, 즉 올바른 생활규범과 인간의 가치기준에 토대를 두고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또는 ‘깊이 깨우치는 정신 수양’으로 ‘도(道)’를 착안할 수도 있다. 또 무위자연과 만물의 근원을 ‘도(道)’라고 하는 노장사상(老莊思想)의 영향도 받았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태권도의 ‘도’를 이렇게 해석하는 태권도 학자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필자는 좀 다르게 해석한다. 최홍희가 ‘태권(跆拳)’를 먼저 정해 놓고 나중에 ‘도(道)’를 붙인 것은 일본 무도(武道)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가노 지고로는 1882년 산만했던 유술(柔術)을 정리해 기본원리와 기술체계를 만들고, 투기 요소만 있었던 유술에 지(智)와 덕(德)을 기를 수 있는 교육적인 가치를 가미하고, 정신적·사상적 의미를 더해 ‘유도(柔道)’로 변화시켰다. 이런 과정은 가노 지고로가 만든 유도의 본산 강도관(講道館)에서 이뤄졌다.

동양무예학자 허건식 박사는 “가노 지고로가 유술을 학교 체육과목에 넣는 작업을 하던 중 자신이 배웠던 기도류 유술에 내려오는 ‘유도우중문답(柔道雨中問答)’이라는 편지에 ‘유도’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고 도를 참고해 ‘유술’을 ‘유도’로 전환했다”고 풀이한다.

‘술(術)’에서 ‘도(道)’로 전환은 실전적·실용적 수련 가치에서 정신적·교육적 가치로 변화한 것을 의미하며, 이는 신체적 수행(修行)과 연결된다.

이 같은 영향을 받아 대일본무덕회는 1920년까지 검술이라고 불리던 것을 검도(剣道)로 명칭을 개칭한다. 유도와 검도는 일본 문교성이 학교체육 교육과정으로 만들면서 학생들에게 필수과목이 됐다. 그것이 일본의 민족주의와 군국주의를 강화하는 도구로 악용되었다고 해도, ‘도(道)’는 도덕 함양과 체력 증진 등 교육적·정신적 의미가 함축됐다고 할 수 있다.

오키나와에서 토착 섬주민들이 호신권법으로 했던 ‘오키나와 테(手)’가 일본으로 건너와 ‘가라테’로 바뀌는 과정에서 유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27년 가라테연구회가 기관지에 가라테를 ‘당수(唐手)’에서 ‘공수(空手)’로 바꾼다고 발표한 후 가라테 창시자로 일컬어지고 있는 후나고시 기친(船越義珍)이 1936년 『가라테교본』을 펴내면서 일본의 다른 무도처럼 ‘도(道)’를 붙여 가라테를 ‘공수도(空手道)’라고 칭했다.

양진방은 1986년 ‘해방 이후 한국 태권도의 발전과정과 그 역사적 의의’(서울대 석사학위논문)에서 “그 당시 한국에는 체계화 된 무도가 없어 수입된 일본의 유도와 검도를 통해 무술의 구체적인 규범과 개념 및 정신 등을 접하게 됐다. 태권도는 해방 이후 20년이 지난 후에도 기술적인 면이나 철학적인 면에서 모두 일본 가라테(공수도)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양진방의 말에 동의한다. 일본 무도 개념을 주체성 없이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였던 해방 전과 그 이후의 상황에서 최홍희도 결코 자유롭지 않다.

1940년대 초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가라테 최대 유파인 송도관(松濤館)에서 가라테를 배운 그는 스승 후나고시 기친이 가라테의 경기화를 반대한 영향을 받아서인지 태권도 경기화를 반대했다.

1955년 최홍희가 부관 남태희와 함께 옥편을 훑어 ‘태권(跆拳)’이라고 한 후 ‘도(道)’를 붙인 것은 유교와 노장사상의 영향보다는 자신이 수 년 동안 가라테를 배우면서 익숙해진 ‘공수도’의 ‘도(道)’를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도’가 지향하고 있는 교육적·정신적 의미와 가치를 자기 나름대로 풀이해서 ‘올바른 길’ 또는 ‘정신수양’이라고 했다고 본다.

최홍희가 저술한 『태권도 교서』(1973)에서 그는 “발만 쓰던 택견(태껸)과 주로 손 기술에 의존하던 가라테(공수도)를 종합 연구하여,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무도로 발전시킨 다음 (…) 태권도로 단일화”했다고 밝혔다.

‘태권도’의 ‘태권’은 발음이 비슷한 ‘태껸’을 참고해 짓고, ‘도(道)’는 가라테, 즉 공수도의 ‘도’를 차용해 붙인 것이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최홍희는 ‘당수도’, ‘공수도’라고 하는 왜색 가라테 용어에서 벗어나기 위해 ‘태권도’라고 했지만, 정작 일본 무도가 지향하는 ‘도’의 규범과 개념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고 여겨진다.

서성원 / 태권박스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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