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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2년 타계한 고(故) 최홍희 국제태권도연맹(ITF) 창설자(이하 최홍희)를 둘러싼 ‘태권도 창시자’ 논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ITF는 ‘최홍희=태권도 창시자’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ITF에 소속되어 있는 단체와 태권도인들은 △국제적 명성의 브리태니커 사전에 최홍희가 태권도 창시자라고 명기돼 있고 △1955년 ‘태권도’ 명칭을 만들었으며 △태권도 5대 정신과 틀(창헌류) 등 독창적인 기술체계를 확립했기 때문에, 최홍희는 태권도 창시자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특히 1959년 태권도계 최초로 『태권도교본』를 펴낸 데 이어 『태권도지침』과 『태권도백과사전』 등 역작을 출간한 것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는 게 중론이다. 그를 보좌했던 정순천 씨는 “1800개의 태권도 술어와 3200여 개의 동작을 만들어 낸 것은 최 총재가 사선을 넘으면서 일구어낸 파노라마와 같다”고 평하기도 했다.

북한 ITF도 최홍희를 태권도 창시자라고 지칭하며 예우하고 있다.  2018년 11월 최홍희 탄생 100주년 추모식에서 <조선중앙통신>은 북한 태권도 단체들이 정통 태권도를 과학적인 무도로 발전시키고 인류에게 태권도를 보급하기 위해 애쓴 그를 추모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국기원과 세계태권도연맹(WT) 안팎에서는 ‘최홍희=태권도 창시자’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경명 태권도문화연구소장(타계)은 “태권도 창시자란 태권도를 처음 시작한 사람을 의미하는데, 우리들은 그와 같은 의미에 동의하지 않을 듯싶다. 왜냐하면 최홍희가 오늘날 태권도를 처음 시작하고 보급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인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ITF와 거리를 두고 있는 태권도계는 최홍희가 창안한 태권도와 국기원 및 세계태권도연맹이 추구하는 태권도가 다르다는 것을 언급하며 “최홍희는 ITF 창설·창시자일 뿐”이라고 선을 긋고 있다. 태권도 수련 및 기술체계가 다른데, 어떻게 최홍희를 태권도 창시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나영일 서울대 교수는 2006년 국기원이 주최한 ‘태권도 역사-정신 연구 세미나’에서 “남한을 배척했다고 해서 최홍희가 사망한 지금까지도 백안시한다는 것은 조금 지나친 처사이다.  ‘태권도’라는 이름을 새롭게 만들어낸 최홍희의 공(功)은 크다”고 하면서도 “태권도를 그가 홀로 창시했다고 하는 것도 지나치다”고 주장했다.

1980년대 ITF 사범으로 북유럽에서 활동한 림원섭 사범도 최홍희를 비판했다. 그는 1998년 10월 <태권도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최 총재의 회고록 『태권도와 나』 책에는 태권도 동작 사진이 15개 있다. 그 중 중복된 동작 사진은 5장이 있어 실상은 10장의 동작 사진이 있는데, 5장 동작은 태권도 동작이 아니다. 가라테 동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옆차기는 가라테 동작과 똑같다. 이는 교묘히 우롱하는 처사”라고 했다.

이런 가운데, 2018년 11월 ‘최홍희 탄생 100주년’을 맞아 ‘태권도와 삶 ; 최홍희 어떻게 볼 것인가’ 학술대회가 한국체육대학교 합동강의실에서 열렸다.

태권박스미디어(대표 구민관)와 한국체육대학교 태권도학과(학과장 장권)이 공동 주최하고, 태권박스미디어가 주관한 이날 학술대회에서 ‘태권도 창시자’ 논쟁이 재점화했다.

허건식 발제자(2019충주세계무예마스터십조직위원회 기획조정본부장)는 ‘무예 인물사로 본 최홍희’ 발표에서 “세계 태권도를 이끈 두 분은 최홍희와 김운용”이라고 운을 뗀 뒤 “최홍희가 태권도를 창제·창시한 것이 맞다고 본다. 태권도를 100% 만들어야 창시와 창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최홍희는 ‘Found’(창설자·설립자)이다. 태권도 이념을 부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허 박사는 “태권도 현대사 70년 역사 속에서 특정 인물을 평가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최홍희라는 인물은 가장 기초적인 태권도 연구 영역에서 중요한 기초를 깔고 있다. 최홍희 태권도 창제·창시론 논쟁은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병철 발제자(99운동과학연구소장)은 ‘최홍희 창시자 논란과 공과 재조명’ 발표에서 “태권도는 5대 관(館)에서 시작됐지만 5대 관이 동일하게 각 20%의 지분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최홍희 지분이 가장 많아서 대주주라고 보고 있다”며 “민족주의자 최홍희에 대한 객관적인 재평가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박사는 “현재 태권도는 가라테와 중국 북방무술이 적절히 섞여 있는 것 같고, 한국 토착화 과정에서 우리 몸짓이 들어갔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고 하면서도 최홍희가 태권도 창시자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듯한 말을 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 허 박사와 한 박사가 ‘최홍희=태권도 창시자’에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자 곽정현 토론자(가천대 태권도학과 교수)는 즉각적으로 반론을 폈다.

그는 “태권도가 오랜 시간 변화·발전한 무술이라고 생각하는데, ‘태권도 창시자’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은 어느 한 시기에 나타난 ‘창작 무술’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고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박성진 토론자(인사이드태권도 기자)는 “최홍희는 가노 지고로(유도 창시자)보다는 (오키나와테 당수도를 일본 공수도로 바꾸는데 큰 역할을 한 후나고시 키친(근대 가라테 아버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태권도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무술에 창시자가 있냐 없냐 라고 하는 점에서 최홍희를 태권도 창시자라고 하는 것은 좀 어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홍희를 둘러싼 태권도 창시자 논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태권도 기관과 학계에서 진척된 연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럼 최홍희의 태권도 삶을 연대기로 살펴보자.

홍희는 1918년 12월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5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는데, 약한 체질을 타고나 부모가 근심할 정도였다.

그는 공부를 싫어했다. 하지만 한학(漢學)에 주력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소학(小學)과 명심보감 등의 한문을 익혔다. 최홍희는 여덟 살 때부터 일본을 배척했다. 배일사상(排日思想)이 싹튼 것은 일본인들의 잔악한 만행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최홍희의 회고담.

“가장 처참했던 것은 독립운동가들을 공산주의라는 올가미를 씌워 무참히 학살한 것이다. 나는 열한 살 때 독립운동가 중 몇 사람이 지둔지 고개를 향해 도망치다 뒤에서 쏜 일본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광경을 보았다.” <최홍희(2006). 태권도와 나. 도서출판 길모금. 22쪽>

최홍희는 훗날 태권도를 창시하게 된 가장 주요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나라없는 백성으로 갖은 설움과 압박을 받은 것이 작용했다며 우리 민족의 무도를 만들어 세계 무도계를 석권하고 일본의 가라테를 박살내 뼈에 사무친 원한의 일부를 갚자는 심정에서였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일본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소학교 6학년 시절, 월사금(등록금)이 올랐다며 친구들을 규합해 동맹휴학을 주도한 혐의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은 최홍희는 1939년 아버지의 지시로 서도(書道)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학문을 익히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먼저 유학생활을 한 친구들의 권유도 그가 일본에 가기로 결심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일본 교토에 정착한 그는 가라테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나로서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왔다 갔다 하면서 주먹질을 하고 있는데 도무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저것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그는 가라테라는 것인데 저것만 하면 고향에 가는데 문제가 없다고 하기에 그때부터 가라테를 배우게 되었다.” <최홍희(2005). 앞의 책. 32쪽>

교토에서 가라테를 수련하면서 영어와 수학을 공부한 최홍희는 고등학교 4학년 과정 입학에 실패하자 더 좋은 기회를 잡기 위해 거처를 도쿄로 옮겼다. 일본 중앙대학 법학과에 진학한 그는 가라테를 열심히 수련했다. 당시 전봇대는 목재로 만들었는데, 거리를 다니면서 손이나 발로 전봇대를 때리고 차면서 전봇대의 전선이 흔들리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최홍희는 가라테를 수련한 이유에 대해 “나는 내가 호신술을 몇 가지 배우지 못하고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권투를 배워볼 생각이었는데, 친구인 김현수가 대학에 있는 가라테 교실을 보로 가자고 설득했다. 그 며칠 후 나는 가라테를 수련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내용은 한국무술을 연구하는 김혜영이 1998년 8월 1일과 1999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최홍희와 인터뷰한 것으로 정우진이 발행한 태권도타임즈 2000년 1월호에 ‘고(故) 최홍희 회장, 그리고 ITF 태권도’ 제목으로 원문이 실려 있다. >

일본 중앙대학 법학과에 재학하면서 가라테부에 있던 최홍희는 부원들과 함께 ‘가라테의 아버지’로 알려진 후나고시 기친(船越)의 송도관(松濤館‧쑈도깡)에서 정식으로 가라테를 배웠다. 가라테 2단으로 승단한 최홍희는 윤병인과 도쿄 YMCA 건물 옥상에서 가라테를 지도했다.<태권도타임즈. 2000년. 1월호>

최홍희는 가라테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배경에 대해 “1904년 오키나와 현립 남자사범학교와 제일중학교에 정식과목으로 채택된 오키나와 가라테(唐手)를 1922년 봄 후나고시란 오키나와 사람이 동경에서 개최된 제1회 운동전람회 때 초청받아 이 무술의 연혁과 가다(型) 또는 기타 이와 관련된 사진들을 서령한 데서 비롯된다. 이것이 점차 일본 조야에 알려지게 되자 중국 냄새가 풍긴다는 의미에서 당(唐)자를 공(空)자로 바꾼 것이므로, 어디까지나 오키나와 무술이라 하겠다”고 말한다. <최홍희(2005). 앞의 책. 37쪽>

하지만 최홍희가 후나고시 기친에게 가라테를 배웠는지 증명하는 사료는 없다. 송도관을 방문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이지만 누구에게 가라테를 배웠는지 명료하지 않다. 사학자 허인욱은 최홍희가 윤병인과 일본 동경 YMCA 옥상에서 무술을 수련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최홍희가 윤병인에게 무술을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고 제기한다. 윤병인은 상당한 무예의 경지에 이미 올라 있었으므로 최홍희가 윤병인과 함께 같은 수련생의 입장에서 수련했다고 하는 것은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허인욱(2008). 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 한국학술정보(주)>. 허인욱의 주장.>

“최홍희가 4292년(1959)에 펴낸 태권도교본을 보면, ‘수도와 수도에 의한 단련’과 ‘손목에 의한 단련’ 항목 편에 두 사람이 마주서서 전진후퇴를 하며 수도와 수도를, 안손목과 안손목‧바깥손목과 바깥손목을 부딪치는 훈련방법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 훈련방법들은 가라테에서는 보기 힘든 훈련방법으로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권법부를 창설한 윤병인의 무예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허인욱(2008). 앞의 책. 36쪽>

허인욱의 생각처럼 최홍희가 윤병인에게 무술을 배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윤병인을 가리켜 상당한 무예의 경지에 올라 있다고 하는 등 윤병인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최홍희는 1944년 1월, 일본의 학도지원병으로 끌려간 후 반일봉기를 하자는 데 뜻을 같이했다가 발각되어 일본 헌병대로부터 고문을 받고 구치소에 이감됐다. ‘평양학병사건’의 주동자가 된 셈이다. 최홍희의 주장에 따르면, 그곳에서 우연찮은 기회에 동료들과 간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기왓장 8장을 격파하는 가라테 시범을 선보여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1945년 6월 재판장에서 징역 7년에 처해진 최홍희는 선고가 바뀌어 사형당할 처지였으나 8월 15일 일본의 패망하고 해방이 되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 후 최홍희는 전국 학병을 대표하는 학병단에서 활동했다. 그러던 중 군사영어학교(국군창설요원)에 입교했다. 그리고 1946년 1월, 조선경비대 육군소위 임관을 받고 전남 광주에서 군복무를 했다. 1947년 대위에서 소령으로 승진한 그는 육군본부로 전속되어 정보참모와 군수참모를 하면서 서울에 있던 미군 헌병들에게 태권도를 소개했다고 주장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최홍희는 1949년 6월부터 서울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선진군대교육을 배우라는 주위의 권유에 따라 최덕신 대령 등과 함께 미국 상급군사훈련학교로 유학을 갔다. 그러나 한국전쟁(6.25)이 일어나 1950년 7월에 귀국해 신설된 육군종합학교 부교장을 맡았다. 그리고 1953년 9월, 보병 제29사단을 창설하라는 명령을 받고 제주도 모슬포로 내려갔다. 당시 육군참모 총장 백선엽의 견제를 받고 있는 그는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로 여기고 전력을 다했다.

29사단장은 그의 태권도 인생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는 29사단을 상징하는 사단기를 만드는 데 힘썼다. ‘29’라는 숫자에서 ‘2’는 분단된 한반도를 상징화했고, ‘9’자는 움켜쥔 주먹을 나타냈다. 한반도 지도에다 주먹을 그린 사단의 마크는 ‘익크 부대’로 통용됐다. 이 시기 최홍희는 대위 남태희를 부관으로 두고 사단 장병들에게 태권도를 교육해 오늘날 오도관의 초석을 이뤘다는 증언도 있다. 남태희의 증언.

최홍희 장군과는 29사단에서 처음 만났다. 내가 육군종합학교 다닐 때 최 장군이 부총장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인연이 없었다. 29사단에 근무하면서 화랑무도관을 만들어 운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29사단장이던 최 장군이 화랑무도관에 방문해 나보고 형(型)을 해보라고 시켰고, 나는 청도관 이원국 관장님께 배훈 형을 시연보였다. 최 장군은 부사단장이었던 하갑천 장군과 함께 아주 흡족해 했고, 그게 나와 최 장군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태권도. 2010 6월호(165호). 대한태권도협회. 106쪽>

최홍희는 남태희를 앞세워 휘하 장병들에게 당수를 가르쳤다. 그는 “내 휘하 장교들과 당수 교관들에게 매우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이 당수를 훈련할 때 군대의 계급과 상관없이 전부 교관들에게 인사를 해야만 했다. 군사 교련과 당수 훈련의 결합은 우리 사단을 한국군의 다른 사단 중에서 유별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태권도타임즈. 2000년 1월호>

최홍희가 이끄는 29사단은 1954년 6월 제주도를 떠나 육군본부직할의 제1군단에 배속됐다. 그 해 9월 제1군단 창설 4주년 기념일이 설악산 오호리 평야에서 열렸는데, 이 날은 최홍희의 태권도 인생에서 상징적인 일이 벌어졌다. 창설 기념식에서 열린 당수대회에서 최홍희가 이끄는 사단이 시범을 보인 것이다. 이 광경을 이승만 대통령은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대통령은 앉지도 않고 줄곧 서서 구경하더니 “저것이 우리나라에 옛날부터 있던 택껸이야?” 한 다음 “이것으로 깨뜨렸지?‘ 하며 자기 오른 주먹의 사용부분을 손가락으로 정확하게 가리켰다. 뿐만 아니라 그는 ”택껸이 좋아. 이것을 전군에 가르쳐야 해. 그 서양 사람들은 윗동이만 쓰는데, 발로 차면 빙그르르 주저앉을 게 아닌가“라고 조크까지 했다. <최홍희(2005). 앞의 책. 155쪽>

이승만 대통령의 이 같은 말은 최홍희를 벅차게 만들었다. 군복무에 지장이 있다며 1990년대 말부터 캐나다에서 수년 동안 최홍희를 보좌해온 정순천은 2010년 한국을 방문한 남태희를 만나 당수도 연무시범의 뒷이야기를 들었다. 정순천은 “그(남태희)는 당시 시대적 상황과 인물들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시연한 그 때를 마치 파노라마 사진을 펼쳐 놓은 것처럼 상세하게 들려주었다”며 남태희의 증언을 이렇게 기록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당수도 시범을 하기 위해 흰 도복을 입고 장병들 앞에서 나설 때  흰 도복을 처음 본 다른 장병들은 낄낄대고 비웃었다고 했다. 당시 도복의 띠는 흰띠, 자띠(적), 검은띠 밖에 없었지만 구분이 단순해서 청띠를 만들어서 메고 시연에 나섰다고 한다. 그리고 15분 당수도 시연을 하는 동안 이승만 대통령 단상에는 이형근 대장을 비롯 당시 최홍희 장군이 자리를 하고 있었으며 예정된 시연이 끝나고 이승만 대통령이 조금 더 해보라는 명령으로 시연을 위해 연습한 것 외에 즉석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게 마땅하지 않아서 남태희가 한차교를 불러내어 겨루기 시연을 15분 정도했다고 한다. 당시 남태희는 기왓장 12장을 정권으로 격파하는 시연을 했는데, 멀리 있는 단상에서 관람한 이대통령이 손으로 가리키며 저것은 무엇으로  격파했는지 묻자, 옆에 있던 최홍희 장군이 정권을 가르치며 이 대통령에게 당수(수도)가 아닌 정권으로 격파했다고 설명했다.” <정순천(2010). 남태희 원로의 한국 방문과 태권도 작명의 비밀. 네이버 지식in. 2010년 4월 2일>

대통령이 무술에 관심을 보이자 무술을 도외시하던 군 수뇌부들을 설득시킬 명분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태권도(跆拳道)’를 작명하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최홍희가 이끄는 29사단은 설악산 서쪽의 용대리로 옮겨 강원도 동해안을 포함한 일대의 작전 책임을 맡았다. 이 때 그는 체육관을 짓게 하고 그 곳을 오도관(吾道館)이라 이름붙였다. 태권도는 남태희가 맡았다. 최홍희는 “오도관의 오도(吾道)는 ‘공자가 나는 오직 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야(吾道一以貫之)’라고 한 말이 나의 성격과 비슷하거니와 내가 연구하는 태권도를 세계로 뻗치겠다는 포부를 뜻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오도관에는 초대 사범이었던 남태희를 비롯해 백준기, 고재천, 김석규, 우종림, 한차교 등이 활동했다. 이들은 청도관 출신으로 훗날 최홍희가 민간 도장에 영향력을 행사할 때 버팀목이 되어줬다.

1955년은 최홍희에게 잊을 수 없는 해이다. ‘태권도’가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1946년 3월부터 갖은 난관을 무릅쓰고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만 9년이 되는 1955년 봄에 이르러 현대적 무도의 기초를 완성하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최홍희(2005). 앞의 책. 159쪽>

최홍희는 당수도를 대신할만한 명칭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부관 남태희와 함께 옥편을 뒤적거리며 연구를 거듭한 끝에 태껸의 ‘태(跆)’자가 뛰고 차고 밟는다는 뜻을 담고 있어 당수, 공수도보다는 주먹권(拳)자를 사용, ‘태권도(跆拳道)’라는 명칭을 만들었다. 정순천은 “태권도 작명가는 최홍희 총재와 남태희 원로 두 사람이다. 굳이 ‘태’자의 발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면, 이승만 대통령의 태권도 작명의 공로(?) 역시 재조명되어야 한다. ‘태권’의 작명 과정에서 서로의 주장은 다르지만 두 사람이 조합해서 만든 것은 태권도사에 이제라도 올바르게 기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태권도 명칭 창안에 대한 남태희의 증언을 들어보자.

“이승만 대통령에게 시범을 보인 날 최홍희 장군이 나와 같이 사단장실로 가자고 했다. 그래서 이 대통령이 이야기한 태껸을 옥편에서 찾아봤지만 없었다. 계속 옥편을 찾아보다가 ‘밟은 태(跆)’를 발견했다. 일단 태를 골라 놓고 그 다음 ‘껸’를 찾았지만 옥편에 없었다. ‘수(手)’자도 고려했지만 당수도, 공수도 등 색채가 진해서 손보다는 강한 ‘주먹 권(拳)’을 선택했다. 태껸과 태권은 발음도 비슷했다. 최 장군과 나는 태권이라는 명칭이 좋겠다고 결심했고, 명칭제정위원회를 통해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태권도. 2010년 6월호. 대한태권도협회. 107쪽>

이처럼 각고의 노력 끝에 태권도를 작명했지만 최홍희의 고민은 계속됐다. 태권도가 당수도와 공수도를 제치고 보편타당성을 확보하려면 공신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견제하고 있는 군 내부의 모략과 당수도와 공수도, 권법을 사용하고 있는 민간도장의 반발이 걱정되었다. 최홍희는 마음 속에 태권도를 숨겨 놓고 기회를 기다렸다. 궁리 끝에 그는 ‘명칭제정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최홍희는 당시 자신을 지원하던 장군 이형근의 힘을 빌려 국회 부의장 조경구를 비롯한 사회 저명인사와 언론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고급 음식점에서 회의를 열었다. 그는 이날을 1955년 4월 11일이라고 증언한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최홍희가 말문을 열었다. “지금 국내 도처에서 같은 무도를 놓고 당수, 공수, 권법 등 제각기 마음대로 명칭으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새로운 이름을 제정하기 위해 모였다”며 이날 모임의 취지를 설명한 최홍희는 각자 명칭을 기재하여 무기명으로 투표한 다음 토의에 붙여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명칭 제정은 최홍희의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개표 수가 거의 5분의 4에 이를 때까지 당수가 아니면 공수도 일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머리 속에는 일본 가라테만 박혀 있을 테니까. 그러다 ‘태권’ 두 글자가 나오니 모두들 처음 듣는 이름이기도 하려니와 좀처럼 드문 ‘태’자라 ‘이것을 누가 냈는지 설명하시오’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먼저 글자 풀이부터 해야겠기에 ‘태’자는 발로 뛴다, 찬다 또는 밟는다를 의미하며 ‘권’자는 주먹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주먹은 단순히 손을 폈다 쥐었다 하는 주먹이 아니라 여러 형태의 주먹으로 찌르고, 뚫고 혹은 때리는 무도행위를 뜻하는 주먹입니다’하며 시범했다.” <최홍희(2005). 앞의 책. 160-61쪽>

발음이 비슷한 ‘태권’과 ‘택껸’의 역사성도 거론하며 참석자들을 설득하자 최홍희가 갈구한 태권도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최홍희는 이승만을 경호하는 경무대 실력자들을 고급 술집에서 융숭하게 접대해 ‘택껸’을 고집하는 이승만으로부터 한자로 쓴 ‘跆拳道 雩南’ 휘호를 받아냈다며, 이 휘호가 발표됨으로써 태권도는 누구의 모략도 받을 수 없이 공식 명칭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태권도를 창시하기 위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과 술자리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최홍희(2005). 앞의 책. 162쪽>

이런 연유로 최홍희를 추앙하는 사람들은 4월 11일을 ‘태권도의 날’로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태권도 역사학자 이경명은 이 같은 논리에 의문을 제기한다. 태권도 명칭제정과 이승만으로부터 태권도 휘호를 받는 과정이 의혹투성이라는 것이다. 이경명은 태권도 명칭 제정은 1955년 4월 11일이 아닌 1955년 12월 19일 대한당수도 청도관고문회회의에서 최홍희가 제안한 ‘태권’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라고 기록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최홍희가 태권도사를 왜곡, 날조했다는 것이다.

이경명은 2001년부터 이 문제를 제기해 왔다. 그는 2001년 11월 태권도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최초의 태권도 명칭은 1955년 12월 19일 청도관 고문회 회의에서 나왔다”고 밝혔다. 그는 이 글에서 “태권도 명명은 엄밀히 말하자면 대한당수도 청도관고문회 모임에서 결의된 명칭 변경이다. 최홍희가 말하는 ‘명칭제정위원회’에서 제정됐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분명한 왜곡이다”고 설파한다. 이경명의 주장을 보자.

“태권도 유래 및 개명의 의의 등 그(최홍희)의 저서에 따르면, ‘대한당수도 청도관 제1회 고문회’ 모임을 ‘명칭제정위원회’로 왜곡하고 있다. 모임 후 한 장의 기념사진과 당시 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나란히 싣고 있는데, 사진에 새겨진 글씨는 단기 4288(서기 1955년 12월 19일)이다. 그런데 정작 주요 단서가 될 신문사명과 보도된 기사의 연월일을 삭제하였다.1955년 4월 11일과 ‘태권도의 날’ 등의 왜곡은 그의 저서 ‘태권도교서(1973)’에서 처음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무도의 성격에 알맞고 역사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이름을 짓고자 고심하다가 마침내 1955년 4월 11일 개최된 명칭제정위원회에서 본인이 제출한 태권도가 만장일치로 가결됨으로써 여태까지 각각으로 불리어 오던 이름을 태권도를 단일화하게 되었다. 4월 11일을 태권도의 날로 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라는 대목이다. 앞서 ‘태권도 우남’ 휘호 관련해 소상히 밝혔듯이 이와 연계되는 모든 사실을 은폐하고자 ‘대한당수도 청도관 제1회 고문회’ 모임 자체를 그는 ‘명칭제정위원회’로 둔갑하고 있으며, 모임은 종로 2가 국일관 요정에서 가졌었는데 그 날자는 1955년 12월 19일이다. 그는 1955년 4월 11일을 명칭제정일이라고 했다가 어느 책에서는 틀(품새)을 완성한 날이라고 하기도 하는가 하면, 더구나 이승만 국부로부터 태권도 휘호가 내려진 날 등 일관성이 없는 주장을 펴고 있다.” <무카스. 2010년 10월 12일>

이경명은 1955년 4월 11일에 태권도 명칭을 제정했다는 최홍희의 주장은 “조작되었고, 4월 11일은 가공된 날짜라고 단언할 수 있다”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최홍희가 저술한 『태권도교서』(1973)에 수록되어 있는 명칭제정위원회 사진도 1955년 12월 19일 청도관 고문회 모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명칭제정위원회 사진 옆에 편집되어 붙어 있는 정체불명의 신문기사는 신문제호와 날짜, 기자 이름이 빠져 있어 사료가치가 결여되어 있다는 입장이다. 이 기사를 인용한 몇 몇 논문은 동아일보에 이 기사가 게재되었다고 하지만 이경명이 동아일보를 직접 방문해 1955년 4월에 발간된 동아일보 기사를 마크이로필름으로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이경명 인터뷰. 2011년 12월 22일>

이 같은 반론에 최홍희를 오랫동안 보좌해온 정순천은 태권도 명칭 기원에 대해 이렇게 주장했다.

태권도 명칭 기원은 태권도 역사에 첫 단추를 꿰는 중요한 것이다. 명칭의 기원을 두고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태권도란 무도명의 시작을 두고 최홍희 총재가 1955년 4월 11일 주도한 명칭제정위원회가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요약되지만 (…) 이경명 반론 이후 최홍희 총재를 찾아가서 명칭제정위원회의 배경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결과 동아일보에 명칭제정위원회의 사진이 보도되었다는 것은 최 총재가 언급한 것이 아님을 들을 수 있었다 (…) 최 총재의 주장은 명칭제정위원회 기사가 언제 어떤 신문으로 나갔는지 알 수 없으며 다만 일간지나 유명신문이 아닌 전문지에 나간 것으로 추정했으며 기사가 나간 날짜 또한 4월 11일 이후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았다 (…) 명칭제정위원회의 신문기사 내용 확인 작업은 사진과 활자상태를 가지고 당시 무슨 신문사인지 찾는 방법과 당시 참가한 생존인물들의 증언으로 확인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으로 사료된다. <정순천의 이 같은 주장은 2005년 12월 27일 정순천이 운영하고 있는 ITF연구소, ‘밖에서 본 태권도사 – 태권도 명칭의 기원’ 참조>

이경명은 최홍희가 이승만으로부터 한자로 ‘跆拳道 雩南’ 휘호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조작됐다는 것이다. 이경명의 주장.

“두 차례 대통령에게 ‘태권도’ 휘호를 요청한 날은 1956년 1월 중이었다. 최홍희는 언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한자로 쓴 ‘태권도 우남’이라는 휘호가 내려졌는지 자신의 그 많은 어느 저서에서도 밝히지 않고, 아니 정확히 말해 밝히지 못하고 있다. 그가 주창하는 ‘跆拳道 雩南’(태권도 우남) 휘호! 그는 단 한 번 ‘태권도교본(1959)’에 ‘우남’ 형과 함께 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1960년 발간된 ‘태권도교본’ 재판에서 영원히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 책마저 정보기관에서 회수되는 일련의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나는, 그의 전 3권의 회고록 등에서도 휘호를 게재하지 못한 것은 진정성을 의심받게 한다. 또 다른 하나는, ‘휘호’에 낙관이 없다는 것이 더욱 신빙성을 희박하게 하는 것이다. 그 중대한 역사적 기록을 남기는 행위에 대통령이 휘호에 낙관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위작이라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다른 작품에는 단지 ‘우남’이라는 호만 적고 있는 경우도 있되 반드시 낙관을 빠트리지 않고 있다.” <무카스. 2010년 10월 6일>

이 같은 이경명의 주장에 정순천은 허구라고 반박했다. 2006년 서울에서 박철희를 만났는데 이승만의 태권도 친필 휘호가 존재한다고 증언했다는 것이다.

“박철희 관장은 경무대 태권도 교관으로서(육사초대 태권도교관 역임) 당시를 상세히 증언했으며, 이승만 대통령 친필 복사본을 소장하고 있었다. 박청희의 증언은 이승만 대통령이 태권도 (휘호)를 친필로 하사했으며 최홍희 총재가 태권도 친필을 분실한 부분을 인정했다.” <네이버 지식in. 2009년 1월 27일>

이와 관련된 남태희의 증언도 보자.

“(태권도 휘호를) 직접 봤다. 명칭제정위원회에서 결정을 했지만 우리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느냐? 대통령께 상신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조경구 국회부의장과 이형근 대장이 경무대를 방문했고 대통령의 휘호를 받았다. 그리고 이형근 대장이 대전에 있는 3강구로 내려와서 나한테 (태권도 휘호를) 보여줬다. ‘태권도(跆拳道)’라고 세로로 쓰여 있었고, 옆에 이 대통령의 호인 ‘우남’이 씌여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보관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고, 최 장군이 보관하게 됐다. 그 뒤로는 본 적이 없다.” <태권도. 2010년 6월호. 대한태권도협회. 107쪽>

정순천은 박철희 등의 증언을 토대로 이승만이 쓴 태권도 휘호는 1955년 4월 11일 명칭제정위원회 이후부터 1959년 3월 국군태권도시범단이 활동하던 기간 중에 나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순천은 태권도 명칭 제정 시기와 이승만의 태권도 휘호를 놓고 일각에서 날조라고 주장하는 것은 최홍희와 자신 간의 관계를 개인적으로 관계로 치부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지적한다. 정순천은 “최홍희 총재는 태권도 역사 자료들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소장하고 있었다. 때론 나의 까다로운 자료 제시와 증언 요구에도 상세하게 말해주었다”며 “한국의 제도권 학계에서는 제도권의 눈치와 아부의 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최홍희 총재의 친북 성향을 이용, ITF 최홍희 총재의 자료들을 사장시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정순천의 주장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이경명은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태권도 명칭 제정과 이승만으로부터 태권도 휘호를 받는 과정이 날조되고 조작됐다는 것이다. 이경명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른 자료를 제시했다.

“당시 명칭 제정위원회에 참석했고 대통령으로부터 명칭 승인을 받기 위해 경무대에 갔던 3인 중 한 명이었던 손덕성은, 그날 김창룡 특무대장의 암살로 면담이 취소되었다고 증언했다. 최홍희는 대통령 재가 관련 김창룡 암살사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그때 그런 일이 있긴 있었는데…’하고 여운을 남기면서, 명칭 제정 문제는 자신의 자서전에 적힌 그대로라고 일축했다.” <이호성(2007). 한국무술 미대륙 상륙하다. 스포츠조선. 92쪽>

이경명은 이 같은 사실을 상기시키며 이승만이 태권도 휘호를 써줬다는 최홍희의 주장은 날조됐다고 강조한다. 특히 이승만의 친필 이름과 휘호를 쓴 연도, 낙관 등이 없어 이승만이 쓴 태권도 휘호라고 하기엔 신빙성과 보편타당성이 결여되어 있다. ‘태권도’ 글씨 왼쪽에 있는 이승만의 호 ‘우남’도 이승만의 친필인지 아니면 최홍희가 이승만의 필체를 흉내 내서 쓴 것인지에 대한 의혹도 여전하다. 이경명은 이를 두고 이승만의 휘호가 사실이라면 ‘국기 태권도 1971년 3월 20일 대통령 박정희(낙관)’ 휘호와 너무 대조적이라며 의문을 접지 않고 있다.

1958년 최홍희에게 호기(好機)가 찾아왔다. 이승만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월남 대통령 고딘 디엠이 제29사단의 태권도 시범을 보고 매료돼 태권도 시범단의 월남 파견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국방부의 주도로 최초의 국군태권도시범단이 구성됐다. 단장은 육군 무도부를 창설하여 초대 무도부장이었던 최홍희가 임명됐다. 최홍희는 공군본부에 가서 비행기를 교섭하고 시범단원과 합동훈련을 계획했으나 시범단원 선발 과정에서 민간도장과 반목이 생기기도 했다. 국군태권도시범단은 △단장 최홍희 △지휘 남태희 △섭외 김홍걸 ▵경리 김경을 △단원 고재천 백준기 우종림 곽근식 한차교 김복남 김근택 차수용 윤종걸 김만호 이응삼 이회석 김재룡 등 21명으로 구성했다. 당시 시범단 일원이었던 우종림은 1959년 3월 12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괴성의 공군 수송기를 타고 역사적인 길에 올랐다고 증언했다. 최홍희는 시범단 파견을 “민족의 장거(長擧)요 쾌사(快事)”라며 기뻐했다. 공군수송기를 타고 사이공에 도착한 국군태권도시범단은 월남육군사관학교와 경찰, 학교 등에서 3주간 시범을 했다.

여기서 최홍희와 손덕성의 갈등과 반목을 짚어보자.

1950년대 말, 청도관을 창설한 이원국의 수석 제자인 손덕성이 청도관 2대 관장을 맡았다. 당시 최홍희는 오도관을 창설해 군(軍)에 기반이 있었을 뿐 민간도장과 밀접한 관계가 없었다. 일본 유학시절 가라테를 수련해 가라테 2단이었지만 민간도장에서 발급한 단증은 없었다. 이것은 청도관과 무덕관, 지도관, 송무관 등 민간도장을 폭넓게 아우르려는 최홍희에겐 약점이었다. 이것을 간파한 부관 남태희는 국군태권도시범단에 손덕성이 참가하는 것을 주선하면서, 그 대가로 최홍희에게 명예 4단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에 손덕성은 최홍희에게 명예 4단을 주고 청도관 명예관장직까지 맡아달라고 했다.

이에 대해 엄운규는 “최홍희가 1950년대 중반 청도관 명예4단증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당시 최홍희씨는 29사단 사단장으로 있으면서 군에 태권도를 보급한 공로가 매우 컸다. 그때 청도관 출신의 남태희씨가 최홍희씨 밑에 있으면서 ‘연락관’ 같은 역할을 했는데, 최홍희씨가 청도관 단증이 필요하다고 전해와 명예4단을 수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우리는 2, 3단이었는데, 명예4단을 준 것은 높게 예우한 것이다”고 말했다. <2008년 2월 엄운규 인터뷰. 이 내용은 태권라인 2011년 6월 15일자에 나와 있다.>

이렇게 해서 손덕성과 최홍희는 사이가 좋아졌으나 국군태권도시범단을 파견할 때 손덕성이 민간도장 관장으로 단장을 맡겨달라는 부탁을 최홍희가 거절하면서 반목과 질시가 싹트기 시작했다. 단장 제의를 거절당한 손덕성은 화가 치밀어 1959년 6월 15일 <서울신문>에 최홍희의 명예4단을 취소한다는 성명서를 냈다. 하지만 청도관 출신인 남태희와 엄운규가 최홍희를 지지하고, 대한태수도협회를 창립할 때 청도관장인 손덕성을 배제하고 엄운규를 이사를 선임하자 대항할 힘을 잃었다. 손덕성은 1963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국군태권도시범단을 인솔하고 월남과 대만 등 동남아 순회시범을 마치고 기세당당하게 귀국한 최홍희는 대한체육회와 동등한 무도회를 별도로 창립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던 중 부득이하게 대한체육회에 가입하는 방법을 택했다. 유도회, 검도회와 함께 무도회를 창립하려 했으나 두 단체가 대한체육회에 가입하는 바람에 태권도만으로는 무도회를 만들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태권도가 대한체육회에 가입하려면 해결해야 할 난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유사 무도단체를 통합해 협회를 조직해야 했고, 협회를 대표하는 명칭 통일이 선행되어야 했다. 다급해진 최홍희는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9년 9월 서울 원효로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지도관 윤쾌병, 송무관 노병직, 창무관 이남석, 무덕관 황기 등 태권도 모체관(母體館·기간도장)의 관장을 초청, 약식 좌담회를 마련했다. 이처럼 그가 협회조직과 명칭 통일을 위해 좌담회를 주재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최홍희가 청도관과 오도관을 중심으로 ‘태권도회(跆拳道會)’를 조직한 후 군 장성 신분을 십분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날 최홍희가 주재한 간담회는 그의 뜻대로 진행됐다. 특히 협회 명칭을 결정할 때는 그의 의지가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간담회에 참석한 노병직, 윤쾌병, 이남석 등은 ‘공수도’를 주장했고, 황기는 ‘당수도’가 좋다고 했다. 최홍희가 고집한 ‘태권도’는 50년대 중반부터 오도관과 청도관이 쓰고 있던 터라 다른 관들로부터 견제를 받았던 것이다. 당수도와 공수도가 못마땅했던 최홍희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공수, 당수는 일본말로 가라테인데, 이 좌석에서 가라테를 고집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요. 나는 일제시대 가라테를 배웠으며 (…) 우리가 해방되었고 또 우리 민족무도를 만들자는 뜻에서 가라테를 버리자는 것인데 해방 후에 배운 당신들이 무엇 때문에 가라테를 고집하는 거요? 하고 언성을 높였더니 모두들 아무 반박도 못하고 “그러면 태권도로 합시다” 하고 동의했다.” <최홍희(2005). 앞의 책. 171쪽>

이렇게 해서 1959년 9월 3일, 문교부 체육과장과 대한체육회 이사가 입회한 가운데 대한체육회 회의실에서 청도관·오도관·송무관·창무관·지도관·무덕관의 대표들이 모여 총회를 거쳐 대한태권도협회(大韓跆拳道協會)를 창립했다.

최홍희는 훗날 자신이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이 되고, ‘태권도’가 협회 명칭으로 된 것은 관 대표들이 육군 소장이라는 자신의 권위에 눌려 순순히 응했다고 술회했다. <최홍희(2005). 앞의 책. 171쪽>

우여곡절 끝에 대한태권도협회를 창설한 최홍희는 자신이 회장을 맡고, 부회장은 노병직과 윤쾌병, 이사장은 황기, 상임이사는 이종우, 현종명, 고재천, 이영섭, 이사는 엄운규, 배영기, 정창영 등으로 집행부를 구성했다. 그리고 대표 심사위원은 노병직과 윤쾌병, 심사위원은 이남석, 엄운규, 현종명, 정창영 등이 맡았다. 그러나 대한태권도협회는 무덕관 관장 황기가 탈퇴하고 대한체육회 가입절차를 밟고 있던 중 4.19가 일어나 제대로 활동도 하지 못하고 와해됐다.

최홍희는 1960년 2월 미국미사일학교로 유학을 다녀온 후 그 해 6월 전남 광주전투기지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이듬해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5.16은 최홍희의 인생을 뒤바꿔놓았다. 6군단장(소장)이 됐지만 군사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의 압력으로 예편해야만 했다. 최홍희는 섭섭하고 착잡했다. 군사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았던 그는 박정희와 쿠데타 세력들에게 반감이 많았다.

“8기생 중령들은 대령도 거치지 않고 졸지에 준장으로 둔갑하여 격에도 맞지 않는 장군행세를 하는가 하면 박정희는 전원 군 임무로 돌아간다는 당초의 혁명공약은 아랑곳없이 결국 대통령 자리까지 차지하지 않았는가. 군사정부의 독재로 얼룩진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의 시초였다고 아니할 수 없다.” <최홍희(2005). 앞의 책. 199쪽>

최홍희는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최덕신의 권유로 말레이시아 대사가 됐다. 한국을 떠나기 전 그는 흐트러진 태권도계를 바로 잡을 요량으로 이남석과 엄운규, 이종우를 자택으로 불렀다. 당시 무술계는 포고령 제6호에 따라 사회단체 재등록이 시행되면서 유사단체 통합을 서둘러야 했다. 최홍희는 통합 명칭을 놓고 고심하고 있는 이들에게 “수(手)는 권(拳)의 아들이라 할 수 있으니 기왕이면 아버지가 되어야지 스스로 아들 노릇할거야 없지 않은가”라며 설득했지만 협회 명칭은 대한태수도협회로 결정됐다. 그는 “태수도가 무의미한 이름인데도 부득이 이를 우겨대는 이유는 그들 머리 속에 아직도 친일망국노 정신이 꽉 박혀있기 때문이다”고 개탄했다. <최홍희(2005). 앞의 책. 15쪽>

군 체질에 익숙해져 있던 그는 외교관에 관심이 없었다. 외교는 참사관과 서기관에게 맡기고 1959년에 이어 또 태권도교본 출간을 서둘렀다. 3년 동안 최홍희는 태권도와 가라테를 확연히 구분하기 위해 기술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천지틀과 단군틀을 만들어 태극형이라는 가라테 형과 대치하게 하고 기존에 있던 화랑, 충무, 계백, 을지틀을 합해 도합 20개 틀을 완성시켰다. 24개 틀 중 나머지 4개는 1966년 완성했다. 그는 ‘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 ‘틀’이란 요약하면 예술적 미를 맛보면서 전후좌우에 있는 기상 적을 상대로 싸우는 방법과 상대에게 돌연히 잡혔을 때 이론적으로 푸는 방법을 혼자서 연습할 수 잇도록 공격과 방어의 동작들을 합리적으로 연결한 것이다. 내가 태권도를 예술이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태권도의 틀은 다른 무도와는 달리 코리아의 역사와 창시자의 인생관이 들어 있어 태권도의 핵이며 생명이라 하겠다.” <최홍희(2005). 앞의 책. 227쪽>

1964년 10월 말레이시아 대사직을 그만 두고 귀국한 최홍희는 이남석과 이종우, 엄운규가 주도하고 있는 대한태수도협회에 크게 실망했다. 자신이 만든 태권도가 사용되지 않은 현실에 낙담했다. 당시 태권도계는 대한태수도협회가 대한체육회에 가맹되어 이종우, 엄운규, 이남석 등이 실무를 책임지고 있었다. 태권도 명칭을 되찾기 위해선 대한태수도협회를 거머쥐어야 한다는 생각에 설득과 압력을 가해 1965년 1월 대한태수도협회 회장이 된 그는 자신의 말대로 헝클어진 태권도계를 정리하기 위한 작업에 곧바로 돌입했다.

최홍희는 회장이 되자마자 인맥을 활용해 여러 사업을 전개했다. 그 중 하나가 ‘해외 태권도 순회시범’이었다. 최홍희는 이동원 외무부장관을 만나 유럽과 아프리카를 순회하는 태권도 해외 시범을 적극 요청했다. 이 때 최홍희는 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수도’가 아닌 ‘태권도’를 사용했다. 공보부에 제출한 공식 명칭은 ‘국기(國技)태권도친선사절단’이었다. 최홍희는 ‘국기 태권도’에 “공보과장이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자 “우리나라에 태권도 이외에 국기가 될 만한 것이 또 어디 있소? 하고 말하자 그대로 각의에 올려 통과됨으로써 우리 민족사에 처음으로 국기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최홍희(1998). 앞의 책. 58쪽. 최홍희(2005). 앞의 책. 234쪽>

이에 대해 이경명은 <무카스>에 ‘최홍희의 국기 태권도 유래는 미화이다’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 “태권도라는 명칭은 1965년 8월 5일자로 이사회에서 1표차로 신승, 태수도에서 태권도로 개명됐으나 태권도라는 명칭의 보급은 사실상 더디었다. 위 사실에서도 국기라는 공식적인 기록을 찾아볼 수 없고 언론에도 보도된 바 없다. 최홍희가 주장하는 최초의 국기태권도란 칭호는 그의 자서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미화에 불과하다. 「국기태권도」라는 공식적 명칭 내지 기록은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3월 20일 친필 휘호를 대한태권도협회에 하사함으로써 공식화되었다”고 지적했다. <무카스. 2001년. 6월 27일>

이 무렵 최홍희는 대한태수도협회와 대한수박도회의 통합을 추진했다. 1962년 대한태수도협회를 탈퇴한 황기와 윤쾌병은 대한수박도회를 문교부 사단법인체로 등록해 관장(管掌)하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당시 대한수박도회는 덩치가 큰 무덕관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통합과정에서 배제할 수 없었다.

통합 조건은 대한태수도협회 이사 21명 중 3명을 대한수박도회에 할애한다는 조건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무덕관 사무총장인 서상렬은 명목상 통합이었지만 대한태수도협회가 대한수박도회를 흡수하려는 조건이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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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3월 각 관의 대표들이 태권도 통합을 한 후 놸를 부르고 회식을 하고 있다. 최홍희(오른쪽 뒷줄 세번째)와 황기, 홍종수 등 원로들이 보인다.

1965년 3월 황기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무덕관 고단자들의 동참으로 통합을 일궈낸 최홍희는 1965년 8월 5일 이사회에서 협회 명칭을 ‘대한태권도협회’로 개칭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수박도회를 구성하고 있던 무덕관의 대변인 역할을 하던 김영택의 역할이 컸다. 그가 태권도계의 재통합과정에서 “수박도회와 태수도협회의 통합인 이상 어느 한 쪽의 기존 명칭을 쓸 수 없으므로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진 태권도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최홍희를 신임 회장으로 받아들이는 조건 중의 하나로 ‘태수도’라는 명칭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던 이종우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종우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최홍희는 “서로 기술이 다른 오합지졸로 엉성하게 구성한 태수도협회를 장악해 볼 야심을 품었던 이종우는 손을 들게 됐다. 총회에서 이종우가 고집하던 태수도가 한 표 차이로 졌을 때 두 다리를 뻗고 울면서 죽어도 가라테로 만들고야 말겠다고 추태를 보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지만, 이종우는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다.

 “(태수도로) 한번 정했으면 됐지 왜 자꾸 바꾸느냐고 따졌다. 그랬더니 최홍희가 체육회에 압력을 넣어 사태가 아주 복잡해졌다. 나는 그때 ‘왜 체육회가 명칭까지 바꾸려고 하느냐?”면서 싸우기도 했는데, 결국 태수도 간판을 내리고 태권도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두 다리를 뻗고 울었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주장하면서) 미친 놈(최홍희)이다. 내가 그것 때문에 울었겠는가? 오히려 그 자식이 술만 먹으면 울면서 ‘나는 두 사람(이종우와 엄운규) 밖에 없어, 나는 믿을 사람이 없어’ 그랬다.” <월간 신동아. 2002년 4월호>

최홍희는 1965년 8월, 3년 간의 집필 끝에 영문으로 된 『태권도교본』(4×6판·364쪽)을 펴냈다. 당시 그는 태권도의 기술연구를 비롯해 명칭과 용어를 제정하기까지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내가 아니면 태권도에 관한 책 하나 쓸 만한 사람이 없느냐”며 태권도계의 인재 부족을 탓했다. 오만함도 묻어난다. 최홍희는 이 책이 출간됨으로써 태권도와 가라테의 기술과 철학이 서로 다른 무도라는 것이 점차 인식되기 시작했다며 이렇게 의미를 부여 했다.

태권도를 가라테로부터 완전 분리시키고, 둘째 가라테를 태권도로 속여 돈벌이하는 사이비의 정체를 폭로하고, 셋째 일본 기술을 사수하겠다는 비애국적인 무도인들로 하여금 부득이 태권도 기술로 전환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도록 하고, 넷째 코리언이 일본 가라테를 가르쳐준다 해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엉터리로 가르치는 바람에 민족의 망신을 자아내는 가짜 사범들까지도 이 책을 보고 정확한 가라테를 보급하라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최홍희(1988). 앞의 책. 69쪽>

하지만 1970∼80년대 최홍희를 따르며 ITF 소속 사범으로 활동한 림원섭은 이렇게 반박한다.

“최 총재의 회고록 『태권도와 나』라는 책 안에는 최 총재의 태권도 동작 사진이 15개 있다. 그중 중복된 동작 사진은 5개가 있어 실상은 10개의 동작 사진이 있는데, 5개 동작은 태권도 동작이 아니다. 가라테 동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옆차기는 가라테 동작과 똑같다. 최 총재는 평소 수천 개의 태권도 동작이 있다고 하면서 자기 회고록에 15개 동작, 그것도 중복된 동작이 5개인데, 이는 사람을 교묘히 우롱하는 처사이다.” <태권도신문. 1998년 10월 기고>

당시 최홍희는 태권도의 개념과 정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가 저술한 『태권도지침』을 보자.

태권도란 무엇인가? 이는 수세기동안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숭상해 오던 무술로, 오늘날 우리나라에 의해 완전한 무도로서의 체계와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각국마다 자기 나라의 특징에 맞는 이름을 붙이고 있으니, 중국에서는 ‘군따오’ 혹은 ‘천파’, 일본에서는 ‘가라데’ 혹은 ‘겜뽀’, 말레이시아에서는 ‘실나’라고 각각 호칭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태권도는 글자 그대로 태(跆)는 ‘발로 뛴다, 찬다, 밟는다”라는 뜻이요, 권(拳)은 주먹을 의미하며, 도(道)는 길 혹은 무도의 방법을 의미한다. 따라서 태권도는 몸에 아무런 무기도 호구도 갖지 않고 발로 뛰고 차고 밟고 피하고, 손 또는 주먹으로 찌르고 때리고 뚫고 막고 하는 기술에다 정신수양을 겸한 무도이다. <최홍희(1966). 태권도지침. 광조출판사. 14쪽>

최홍희는 이 책에서 20개 형(型)을 태권도 고유의 것이라고 소개하고, 가라테의 소림류 및 소령류와 함께 자신의 아호(雅號)를 딴 창헌류를 기술했다. 창헌류는 각 형(型)의 이름이나 동작의 수(數), 연무선에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이나 호(號)를 따서 지칭한 것으로 ▷하늘과 땅을 뜻한 ‘천지’ ▷단군성조를 뜻한 ‘단군’ ▷안창호 선생의 아호를 딴 ‘도산’ ▷원효대사를 뜻한 ‘원효’ ▷조선조 성리학 학자 이이의 아호를 딴 ‘율곡’ ▷안중군 의사를 뜻한 ‘중근’ ▷성리학 대학자 이황의 아호를 딴 ‘퇴계’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도를 뜻한 ‘화랑’ ▷이순신 장군을 뜻한 ‘충무’ ▷광개토왕을 뜻한 ‘개’ ▷고려 말 충신 정몽주의 아호를 딴 ‘은’ ▷백제의 명장 계백장군을 뜻한 ‘백’ ▷김유신 장군을 뜻한 ‘신’ ▷김덕령 장군의 시호를 딴 ‘장’ ▷을지문덕을 뜻한 ‘지’ ▷33인의 민족대표를 뜻한 ‘일’ ▷최영 장군의 이름을 딴 ‘영’ ▷독립운동가 조만식 선생의 호를 딴 ‘당’ ▷세종대왕을 의미한 ‘종’ ▷단일민족을 뜻한 ‘일’ 등 20개이다.

최홍희는 창헌류의 특징에 대해 “가볍고 무거운 동작, 그리고 빠르고 느린 동작을 혼합함으로써 몸이 가벼운 사람도 무거운 동작을 할 수 있는 반면 몸이 무거운 사람도 가벼운 동작을 할 수 있도록 하면서 족기(足技)를 광범위하게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태권도계의 평가는 이와 좀 다르다. 최홍희가 일본 유학시절 배운 가라테를 변형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960년대 중반에는 태권도 경기화의 물결이 거셌다. 최홍희는 황기 등과 함께 태권도 경기화에 부정적이엇다. 그는 “태권도의 경기화는 태권도 기술의 3대 요소인 형(型), 대련(對鍊), 격파(擊破) 중에서 대련만으로 승부를 결정하게 됨으로 불합리하다. (따라서) 시합을 할 때 착용하는 호구가 기술을 완전히 발휘하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반대했다. <최홍희(1966). 태권도교본. 294쪽>

최홍희는 1959년부터 1960년대 초까지 국군태권도시범단과 태권도외교사절단을 이끌고 베트남과 대만, 아프리카, 중동, 유럽 등지에서 시범공연을 하면서 태권도 국제기구를 창설하는 구상을 해 왔다. 기구의 명칭부터 편제, 규약, 임원 구성 등의 기초작업이 끝나자 1966년 3월 22일 구 조선호텔 로즈룸에서 국제태권도연맹(ITF)를 창설했다. 창설 임원은 김종필, 김완용, 김용태, 이상희, 조하리 등 최홍희의 군 인맥과 정치인 등이 대부분이었다. 부총재는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인 노병직, 사무총장은 엄운규, 기술위원장은 이종우로 되어 있지만 엄운규는 사무총장을 맡은 것이 없다고 강변한다. 가입국은 한국을 비롯해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미국, 서독, 이탈리아, 터키, 통일아랍공화국 등 9개국이었다. 최홍희는 ITF를 창설한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앞날 태권도를 전 세계에 보급하고 그것을 더욱 잘 육성하여 유기적으로 지휘할 목적에서 이에 국제태권도연맹을 창설하였으니 이것이 우리 반만년 역사에서 처음인 국제기구의 본부이다. <최홍희(2005). 앞의 책. 250쪽>

세계에 태권도를 보급하고 유기적으로 지휘할 목적으로 ITF를 창설했다는 게 최홍희의 주장이다. 하지만 반론도 있다. 최홍희는 대한태권도협회 후임 회장으로 노병직을 내정하고, 국제태권도연맹을 창설했다고 하지만 이종우의 말은 이와 다르다. 1966년 1월 최홍희가 노병직을 후임 회장으로 내정하고 스스로 회장직에서 물러난 것이 아니라 임원들의 반발로 밀려났다는 것이다. 최홍희의 퇴진을 주도한 사람은 이종우였다.

“최홍희는 협회를 사조직으로 여겨 독선적인 협회 운영을 일삼았다. 그래서 엄운규와 그의 경질을 시도했다. 협회 총회가 있던 날, 아침 일찍 최홍희의 한남동 자택으로 찾아가 사퇴를 종용했더니 6개월만 더 하게 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명예와 돈, 권위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서, 명예를 위해 국제태권도연맹을 만들어 줄 테니 회장직에서 물러나라고 했다.” <태권도신문. 1997년 10월>

엄운규의 증언도 이종우의 말과 비슷하다. 다른 것은 ‘총회’가 아니라 ‘이사회’라는 것이다.

“1966년 최홍희씨가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엉뚱한 일을 해 회장직을 수행한 지 6개월 만에 이사회에서 불신임을 결의했다. 그때 이종우씨가 최홍희씨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영어를 잘 하니 국제태권도기구를 만들면 대한태권도협회에서도 적극 도와주겠다고 권유를 해서 ITF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ITF는 국제기구지만 대한태권도협회에 비해 규모와 상징성 면에서 나은 것이 없었다.” <2008년 2월 엄운규 인터뷰. 태권도신문. 2008년 2월 4일>

 ITF는 국제기구였지만 내실(內實)은 빈약하지 그지없었다. 정부 지원은 고사하고 재정이 열악해 본부 운영비도 부족했다. ITF 본부는 석탄창고로 사용하던 곳으로 사무용품도 변변한 곳이 없었다. 최홍희는 “대기대사직까지 집어치운 때라 수입이 한 푼도 없는 나로서는 운영비에 사재를 털어 넣다보니 몇 개월도 지탱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고 토로했다.

월남전이 한창이던 1967년 5월 최홍희는 월남 사이공에 도착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태권도 교관 및 수련생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당시 월남 전역은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의 지략으로 태권도가 ‘민사심리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당시 최홍희는 채명신 사령관을 이렇게 평했다.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군이 잘 싸운 이유가 만약 태권도의 위력에 있었다면 그것은 초대 주월사령관 채명신 장군의 숨은 공로이다. 채 장군은 휘하 전 부대에 태권도를 장려함으로써 전력을 강화해 베트콩이 접근을 꺼렸고, 끊임없이 태권도 시범을 통해 대민사업에 절대적인 성과를 거뒀다.” <최홍희92005). 앞의 책. 254쪽>

월남 정부로부터 태권도 보급에 공헌했다는 공로로 1등 무공훈장을 받고 한국에 돌아온 최홍희는 대한태권도협회 임원들과 함께 태권도 품세(형)와 동작에 대한 명칭 및 술어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당시 대한태권도협회는 독창적인 품새 제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 대안으로 각 관에서 품새 제정에 참여할 위원을 추천받아 품새제정위원회를 구성, 착수하게 되었다. 품새제정위원은 곽근식(청도관), 이영섭(송무관), 이교윤(한무관), 박해만(청도관), 현종명(오도관), 김순배(창무관) 등이 참여해 팔괘품새와 유단자품새 17개를 만들었다.

당시 최홍희는 대한체육회 강당에서 열린 품세 심의과정에서 동작 자체도 엉망이고 그에 대한 명칭이나 술어조차 없다고 지적하면서 “형의 이름이 먼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형의 주제를 미리 정해놓고 그것을 동작으로 상징해 놓아야 한다. 또 누가 만들었는가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작자가 있어야만 그 형이 지니고 있는 정신과 동작의 뜻을 물을 수 있고 권위도 서게 된다”며 대한태권도협회 임원들이 노고를 폄하했다. 이는 자신이 만든 ‘창헌류’에 대한 자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고 짐작하게 한다.

1968년부터 최홍희는 해외에 태권도를 보급하고 지도할 수 있는 국제사범을 양성해전력을 기울였다. ‘임시국제사범양성소’를 설치한 것도 이러한 이유때문이었다. 당시 국제사범양성소를 수료한 사람은 조희일, 박정태, 조수세 등으로 동남아를 비롯해 서유럽, 오세아니아, 남미, 중동, 아프리카, 북미, 동유럽 등에 사범을 파견했다. 이 시기 최홍희는 미주에서 활동하던 한인 사범들이 자신에게 태권도 교습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준구, 조시학, 강명규, 심상규, 전인문, 김일주, 현준선, 이행웅, 캑크황, 윤덕만, 은상기, 강리, 김병수, 문대원 등이 바로 그들이다. 최홍희는 의기충만했다.

이들 중 대부분이 다년간 배웠던 가라테 기술을 버리고 태권도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니 다행한 일이며 또한 그들로서는 일대혁명을 한 셈이다. 이리하며 미국 내의 가라테 간판이 태권도로 착착 바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후 한국 정부의 압력으로 인해 나와의 접촉이 멀어짐에 따라 불행하게도 그들의 기술은 초보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최홍희(2005). 앞의 책. 270쪽>

이처럼 최홍희는 재정이 궁핍한 속에서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자신이 창안한 태권도를 보급했다. 하지만 대한태권도협회도 해외파견 사범에 전력을 기울이자 국제태권도연맹과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해외사범 파견과 단증 발급의 주도권을 놓고 두 단체가 분규에 휩싸인 것이다. 최홍희는 ‘길을 닦아 놓으니 문둥이가 지나간다’는 속담까지 인용하며 대한태권도협회 측을 싸잡아 비난했다. 특히 “중앙정보부의 끄나풀처럼 된 그들은 국내 협회의 주도권을 잡고 정통파 태권도인들을 배척할 뿐만 아니라 내게 까지 대항하려 드는 것”이라며 대한태권도협회 김용채 집행부 체제를 적대시했다.

대한태권도협회 집행부, 특히 이종우와 엄운규가 회장인 김용채를 앞세워 최홍희와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최홍희의 권세가 예전만 못했기 때문이다. 최홍희는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의 노선에 반감을 표출하며 불편하게 지냈다. 이런 틈새를 공화당 국회의원이었던 김용채와 이종우, 엄운규가 십분 활용했을 것이다. 최홍희와 맞설 수 있는 배경과 힘이 생겼던 셈이다.

어쨌든 국제태권도연맹과 대한태권도협회 간의 갈등은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했다. 1968년 4월 최홍희가 문교부 제6회 체육상 연구부문 대상 수상자가 됐는데 대한태권도협회에서 수상이 온당하지 않다며 반대했다. 최홍희가 저술한 태권도 관련 서적이 가라테 서적을 표절해서 대외적으로 ‘태권 한국’의 위신을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이는 최홍희의 정통성을 부정한 것인데, 최홍희는 이를 두고 가라테를 고수하던 사람들이 태권도 공로자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며 분개했다.

1968년 4월 17일 국제태권도연맹을 탈퇴한 대한태권도협회는 그 해 8월 국제태권도연맹과 또 충돌했다. 두 단체가 국제군인체육대회(CISM) 집행위원회에 제출하기로 합의한 태권도 경기규정이 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국제태권도연맹 측에서 다른 경기규정을 각 회의대표에게 우송했다는 진위를 놓고 혼선을 빚게 되면서 불신이 극에 달했다. <중앙일보. 1968년. 8월 2일>

최홍희는 대한태권도협회와 대립각을 세우자 1968년 7월에 태권도진흥회를 결성하여 독자적인 협회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문교부의 승인 거부와 대한태권도협회에서 태권도진흥회과 관련된 임원을 제명하자 결성이 좌절되었다. <허인욱(2008). 앞의 책. 151쪽>  대한태권도협회는 국제태권도연맹이 유사단체를 지원하며 파벌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국제태권도연맹의 해체를 주장하고, 협회 내에 태권도 해외 보급 및 지도자 해외파견 등 대외관계를 전담할 상설기구인 ‘국제분과위원회’를 신설했다. 최홍희는 즉각 성명서를 내며 강하게 반발했다.

대한태권도협회 일부 간부들이 일본의 공수도(가라테)를 보급하고자 함으로 본인이 이를 저지코져 다년간 그들에게 충고를 했는데 (…) 대한태권도협회는 작년 7월 15일 국제태권도연맹에 정식 가맹했고 협회장은 본 연맹 부총재직과 한국지부장까지 겸임했음에도 불구하고 협회는 본인의 체육상 수상을 방해할 목적으로 4월 17일 일방적으로 탈퇴한 것인데, 협회가 국제태권도연맹을 제거하였다 함은 실로 상식 외의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강원식-이경명(1999). 태권도 현대사. 163-4쪽>

이처럼 두 단체가 날선 공방을 벌이며 참예하게 대립하자 대한체육회는 1968년 9월 3일 업무 구분을 명확히 하기 위해 나섰다. 국제태권도연맹에서는 산하 도장을 갖지 못하도록 하면서 국제 간의 친선을 도모하는 업무와 건전한 국제경기를 관장하고, 대한태권도협회에서는 국내 도장설립과 감독, 국내 대회 관장 및 선수 양성 등의 업무를 맡도록 했다. 그 해 9월 20일에는 문교부‧국방부‧중앙정보부 및 체육회 대표로 구성된 8인의 ‘태권도분규수습위원회’가 신설하고 두 단체 간의 분규를 없애려고 했다. 최홍희는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박정희의 지시로 분규수습위원회가 생겼다며 반기지 않았다.

두 단체는 분규수습위원회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해외 태권도 사범 파견을 놓고 대립했다. 1968년 12월 9일에 국제태권도연맹과 대한태권도협회 간에 작성된 합의서 내용을 보면 ▵사범의 해외파견업무는 대한태권도협회 소관이니 당분간 태권도 국제적 보급을 위하여 대한태권도협회 회장과 국제태권도연맹 총재가 협의하여 파견키로 했다. 단 1969년 9월 2일까지 만 1년간 해외 사범파견에 대한 권한을 대한태권도협회에서 완전 장악하기로 했다. ▵대한태권도협회는 국내의 기존 17개 중앙도장과 지관 간의 계열을 없애기 위하여 지체없이 지역별 명칭으로 개칭하도록 했으며 ▵국제태권도연맹은 여하한 단증도 발급할 수 없으며 가맹국으로부터 4단 이상자에 대한 인준 신청이 있을 경우에는 이를 인준하고 인준서를 발급할 수 있다고 했다. 단 대한태권도협회에 대해서는 인준 권한을 위임하고 4급 이상자에 대하여 국제태권도연맹에 등록만을 시키는 것으로 했다. <허인욱(2008). 앞의 책. 383-4쪽>

최홍희는 해외사범 파견과 단증발급은 국제태권도연맹의 고유 소관 업무라고 여겼다. 하지만 대한태권도협회가 이 업무들도 자기들이 하겠다고 억지를 쓰고, 분규수습위원회의 지침대로 해외사범 파견에 대한 대한태권도협회의 동의를 얻기 위해 보낸 서류를 무조건 회송하는가 하면 이종우를 시켜 해외에 나간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만든 것을 하도록 지시해 달라는 요구까지 했다며 분을 삭였다.

국제태권도연맹과 대한태권도협회 간의 분규는 197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1970년 5월 15일 대한체육회 태권도분규수습위원회는 대한태권도협회 부회장인 엄운규를 국제태권도연맹 사무총장으로 선출하고 국제태권도연맹 규약을 통과시켰다. 이날 위원회는 분규 수습의 핵심인 도장 문제를 숙의, 대한태권도협회 및 국제태권도연맹 산하의 도장을 단일화하여 연맹과 협회의 인사들도 균등히 운영하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구체적인 문제는 연맹 총재 최홍희, 협회 부회장 엄운규, 체육회 사무총장 김성집 3인 소위원회에 맡겨 매듭짓도록 했다. <경향신문. 1970년 5월 19일>

하지만 최홍희는 1971년 8월 분규수습위원회 전제회의에서 불만을 나타내고 탈퇴했다. 이렇게 되자 수습위원회는 더 이상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돼 해체되고 최홍희와 대한태권도협회 간의 반목은 심화됐다. 당시 대한태권도협회 7대 회장으로 취임한 김운용은 대한체육회에 가입되어 있는 단체는 대한태권도협회가 유일하다며 국제태권도연맹과의 차별화를 선언했다. 이에 대해 최홍희는 쓴맛을 다시며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는 온건한 김용채 회장을 밀어내고 경호실 차장으로 있는 김운용을 그 자리에 앉히는 바람에 다시 악화되더니 결국 완전히 (수습이) 결렬되고 말았다. 솔직히 나는 과거의 군대시절만 생각하고 김운용이 회장이 되면 그래도 좀 나아지겠지 하는 일루의 희망을 가졌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나 어리석고 순진한 생각이었다. <최홍희(2005). 앞의 책. 281쪽>

국제태권도연맹과 대한태권도협회, 최홍희와 김운용 간의 관계가 악화되고 박정희 정권을 비토했던 최홍희는 갈수록 입지가 좁아졌다. 박정희 독재체제가 구축되자 최홍희는 1971년부터 암암리에 망명계획을 구체화했다. 해외여행이 통제되는 등 국내 정세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감지한 그는 탈출을 감행했다. 2개월 간의 고루한 방랑생활 끝에 캐나다 토론토에 도착한 것은 1972년 3월이었다. 1개월을 기다려 이민수속을 밟은 그는 태권도 덕분에 캐나다에서 노동허가증을 받고 토론토에 정착했다. 이민수속을 도와준 사람은 애제자인 박종수였다.

하지만 최홍희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중 채명신은 최홍희가 회고록에서 한국을 떠나게 된 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견제와 신변안전을 위해서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이렇게 반박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1960년대 초) 최 장군이 말레이시아 대사를 하던 시절 말레이시아에 태권도를 보급해 공(功)이 있는 사람이지만, 금전에 관해서는 깨끗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욕심이 많았다. 그런 것이 문제가 돼서 청와대에 보고가 되고 결국 대사에서 면직이 된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이북에서 접촉이 온 거다. 최 장군은 친형이 북한 노동당 간부였다. 그래서 핀란드에선가 아마 최 장군이 형을 만나 (북한으로 가는 것이) 결정되었던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 최 장군이 최덕신(崔德新, 전 외무부장관, 월북) 장군을 포섭했다. 나중에 내가 미국 보스턴에 있을 때 최덕신 장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당신이 조국에 기여한 걸 보면, 당신에 대한 대우가 형편없지 않은가’ 하는 거다. 나보고도 같이 북한으로 가자는 거다. 그래서 내가 그이한테 “’여보, 최 선배. 당신은 독립운동도 한 사람이고, 전쟁 때 당신 밑에서 죽어간 수많은 부하들이 있는데, 좀 섭섭한 점이 있다고 해서 어찌 국가에 반역을 하고 이북으로 갈 수가 있소’하고 말했다. 그 후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중에 최덕신과 최홍희는 이북에서 김일성이 평양시민 군중대회를 해줄 정도로 영웅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이북의 지원으로 캐나다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태권도를 전파한 걸로 알고 있다.” <태권도신문. 2008년 9월 25일>

최홍희는 왜 캐나다를 선택했을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 캐나다가 중립국이라 태권도 이념에 합치되고 조국통일 운동을 하는데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최홍희의 주장이다.

1973년 어렵게 정식 영주권을 받은 최홍희는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김운용 주도로 세계태권도연맹(WTF)이 창설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박정희가 태권도를 개인의 정치도구로 쓰기 위해 세계태권도연맹을 만들어내며 허위선전과 만행을 서슴없이 행했다며 분개했다. <최홍희(2005). 앞의 책. 301쪽.>

영주권이 발급되고 생활이 안정되자 최홍희는 활동 반경을 넓혀나갔다. 1973년 볼리비아태권도협회 창설식에 초청을 받아 참석하고, 국제태권도시범단을 조직해 독일·스위스·프랑스·이집트·자메이카·콜롬비아 등을 순회하며 시범을 했다.

국제태권도연맹이 주최하는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도 준비했다. 1974년 7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23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대회를 개최했다. 최홍희는 이 대회로 말미암아 세계태권도연맹이 한국신문을 통해 국제태권도연맹이 해체되었다고 하는 선전이 허위로 폭로되고 국제태권도연맹 경기규정의 우월성이 증명되었다고 기뻐했다.

그러던 1975년 1월, 최홍희는 박정희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오타와 한국대사관 관계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나는 태권도를 방해하는 자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그냥 두지 않는 사림이다. 태권도를 못살게 구는 박정희를 규탄하는 원고를 여러 신문에 내도록 부탁하고 기다리는 중이다”고 말했다. 다음은 당시 최홍희가 작성한 신문 원고의 일부.

(…) 도대체 박정희가 태권도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태권도의 역사와 현황을 잘 알고 있는 그가 최홍희가 있는 한 제 마음대로 태권도를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고립시킬 목적으로 국내는 물론 세계 각국에 태권도를 개척한 내 제자 사범들에게까지 여러 압력과 간계를 써서 내가 만든 기술을 말살시키고 (…) 국제태권도연맹의 해외 활동까지도 막으려고 각 국 주재공관에 지시하여 국제사범들에게 여권과 국내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구실로 공갈 협박을 한다거나 (…) 졸렬하게 최홍희란 한 개 자연인의 활동을 막기 위해 민족의 수치를 자아내는 민족의 역적 박정희를 하루속히 아름다운 우리 강산에서 몰아내는데 다 같이 힘씁시다. <최홍희(2005). 앞의 책. 234-7쪽>

박정희에 대한 원한과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이것을 계기로 최홍희는 박정희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혔다. 최홍희는 공산권에도 태권도를 보급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1978년 시범단을 이끌고 최창근, 이기하, 박정태 등과 함께 폴란드와 헝가리 등 동유럽 공산국가로 갔다. 이것이 최홍희로 하여금 공산국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고 1980년 북한에 갈 수 있는 자신감을 길러줬다. <최홍희(2005). 앞의 책. 281쪽>

1979년 6월, 동유럽 4개국, 서유럽 10개국이 참여한 통일유럽태권도연맹을 만든 그는 사상과 이념, 그리고 종교를 초월해 동서진영을 한데 묶어놓은 국제기구가 태권도 이외에 어디 있느냐며 ‘역사적인 날’이라고 기뻐했다. 이 때 회장에는 이기하, 기술위원장에는 림원섭이 선출됐다.

태권도가 종교와 사상, 인종을 초월한다고 믿은 최홍희는 1970년대 말부터 북한 방문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그러나 북한체제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일을 준비하고 추진해야 할 지 막막했다. 우여곡절 끝에 북한의 평화통일위원장 겸 부주석이었던 김일이 해외 언론기관에 해외 인사 10명을 초청하자 이 기회를 활용해 태권도시범단(15명)을 조직한 후 캐나다 토론토를 떠나 스톡홀름과 모스크바를 거쳐 1979년 북한에 도착해 34년 만에 고향을 찾았다. 그리고 이듬해 1980년에 태권도 시범단을 결성해 북한에 갔다. 시범단 일행은 이기하, 박정태, 림원섭, 이석희, 최중화, 김석준 등 10여 명이었다 최홍희는 북한에 간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북한에 들어가게 된 동기는 태권도를 가르칠 수 있는 곳이면 이 세상 어디든 간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아마 달에서도 태권도를 배울 사람이 있다면 나는 갈 것이다. 북한도 내 조국인데 가지 못할 이유가 뭔가. 북한은 국제태권도연맹 산하에 있는 가입국의 하나이다.” <인사이드월드. 1997년 3월호>

북한에 발을 내디딘 최홍희는 그 후 태권도 사범요원 교육을 맡는 등 활동 폭을 넓혀나갔다. 1981년 2월, 최홍희는 북한의 요청을 받아 들여 평양에서 제1기 사범요원교육을 총괄했다. 보조는 박정태가 했다. 7개월 간의 교육을 마치고 44명의 교육생 중 19명에게는 4단, 나머지는 3단을 줬다. 그는 “7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보통 10년 이상 배워야 할 그 많은 동작들을 완전 습득한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고 기뻐했다. 당시 최홍희는 북한을 기점으로 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과 제3의 세계에 태권도를 보급하겠다는 열망이 가득했다. <최홍희(1998). 앞의 책. 3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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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초 북한 평양 을밀대 앞에서 태권도를 지도하고 있는 최홍희(가운데). 그는 1980년 10월 태권도시범단(15명)을 조직해 캐나다 토론토를 떠나 스톡홀름과 모스크바를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 최홍희는 북한에 간 동기에 대해 “내가 북한에 들어가게 된 동기는 태권도를 가르칠 수 있는 곳이면 이 세상 어디든 간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아마 달에서도 태권도를 배울 사람이 있다면 나는 갈 것이다. 북한도 내 조국인데 가지 못할 이유가 뭔가. 북한은 국제태권도연맹 산하에 있는 가입국의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인사이드월드』1997년 3월호 참조>

그는 1980년대 초 친아들 최중화를 가족과 함께 평양으로 보냈다. 제2기 사범요원교육을 도와주면서 기술을 향상시키라는 권유를 최중화가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한 달 후 최중화는 전두환 암살음모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수사대상에 올랐다. 이를 두고 최홍희가 경찰 수사를 미리 알아채고 최중화를 북한으로 피신시킨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지만, 최홍희는 “우연의 일치다. 동족을 학살하고 정권을 약탈한 전두환은 박정희를 무색하게 할 정도의 폭군이다. 설사 중화가 암살음모사건의 주모자라고 해도 조금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중화는 2008년 9월, 한국을 떠난 지 34년 만에 귀국한 자리에서 전두환 암살음모 사건에 대해 이렇게 털어놓았다.

“당시 광주사건(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캐나다에 상세히 보도됐다. 20대였던 나는 정치가 무엇인지 몰랐다. 옳고 그름을 떠나 국민들이 당하는 것을 보고 아픔을 느끼지 못하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는 와중에 이북으로부터 누구를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본의 아니게 통역도 하게 됐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관여됐다는 얘기를 한다. 이북에서 만들어 낸 사건에 내가 본의 아니게 관여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상하게 한다, 사살한다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잘못을 시인한다. 정치적 순진함, 모험심, 이런 게 합쳐져서 그런 실수도 했다.” <동아일보. 2008년. 9월 8일>

북한에 간 최중화는 부친인 최홍희의 뜻에 따라 ITF 태권도를 가르쳤다. 당시의 상황을 최중화는 이렇게 회고했다.

“80년대 부친이 ‘이북도 우리 민족이고 태권도를 모르면 안 된다’면서 태권도 시범단 16명을 구성해 이북을 방문했다. 나도 시범단의 한 명이었다. 이후 이북과 계약을 하고 사범교육을 했다. 1981년 1기, 1982년 2기생을 교육했다. 하지만 3기부터는 이북 자체에서 교육하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우리 보고 손을 떼 달라는 얘기였다. 이후 본의 아니게 이북에서 약 2년간 더 생활한 뒤 1983년 동유럽으로 나와 태권도를 보급했다. ” <동아일보. 2008년. 9월 8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북한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북한의 요청에 따라 사범을 양성하는 등 태권도를 보급하는 만큼 해외에 사범을 파견하고 시범단을 운영하는 권한은 북한이 아닌 ITF가 행사하길 원했다. 당시 최홍희는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고수했다. 해외에 파견된 국제사범은 ITF가 지휘 통제한다, 총재를 통해서만 해외에 나가 있는 사범들과 접촉할 수 있다, 조선태권도위원회는 ITF 승인없이는 어떠한 나라에도 시범단이나 사범을 파견할 수 없다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는 북한에 ITF가 귀속되지 않겠다는 최홍희의 강한 의지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북한은 태권도 기술을 전수받자 사범양성 및 파견과 시범단 운영을 자체적으로 하겠다고 밝혔다. 최중화의 증언.

“처음에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생이 갖고 계신 기술을 몽땅 두고 가시오. 우리가 하겠소”라고 얘기하더라. ITF를 본인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겠다는 것이었다. 교육 후 ‘이런 사람을 파견해 달라’고 하면 엉뚱한 사람이 파견되기도 했다. 기술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대사보다 높은 비행기 좌석에 앉아 어느 나라로 간다고 하더라. 태권도만 하는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동유럽에서 태권도를 보급하다 보면 현지 외교부에서 불평도 많았다. ‘사범으로 온 사람은 찾을 수 없고, 태권도도 안 가르친다. 이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우리는 안다. 다 추방하겠다’고 했다. 가는 나라마다 그런 얘기를 들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벌써 주도권은 이북이 갖고 있었다.” <동아일보. 2008년. 9월 8일>

최중화는 2008년 9월 한국정부의 승인 속에 34년 만에 귀국한 후 북한 태권도의 실상을 폭로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장웅 계열 ITF가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전위조직”이라며 북한의 태권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다시 80년대 초로 돌아가자. 최홍희는 1980년 8월, 세계태권도연맹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모스크바 총회에서 승인을 받자 다급해졌다. 1981년 5월 이기하와 함께 국제올림픽위원회 본부가 있는 스위스 로잔에 가서 문제를 제기했다. 태권도의 정통성이 없는 세계태권도연맹의 승인을 취소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승인을 취소할 수 없다며 세계태권도연맹과 국제태권도연맹의 통합을 권유했다. 당시 최홍희는 국제올림픽위원회 본부에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최홍희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나는 ITF의 간부들과 함께 제83차 IOC 회의에서 WTF사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실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도둑이 주인행세를 하듯이 사실상 스포츠를 빙자한 정지척 도구이며 팔괘(중국무술)니 태극(일본 가라테)이니 태권도와는 전혀 동떨어진 기술을 장려하는 WTF가 감히 태권도의 이름으로 IOC의 인정을 받으려 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입니다 (…) 명실공히 세계기구인 ITF가 엄연히 존재하는 데도 불구하고 WTF만을 일방적으로 인정하였는가 하고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 태권도가 사이비 단체에 의해 무자비하게 유린당하며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고 잇음을 차마 볼 수 없는 나의 심정을 이해하시고 태권도의 앞날을 위해 올림픽 정신에 부합되며 태권도 본연의 기술을 간직한 기구만을 인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홍희(1998). 앞의 책. 318-9쪽>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최홍희의 ‘반한(反韓) 활동’은 두드러졌다. 북한의 요청에 따라 태권도사범요원교육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북한과 캐나다를 자주 왕래했다. 이를 두고 국제태권도연맹 소속의 일부 태권도인들이 최홍희가 태권도 보급을 빌미로 ‘친북 활동’을 하고 있다며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1982년 5월, 국제태권도연맹 사무총장 김종찬과 심사위원장 최창근이 서울코리아나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최홍희씨는 최근 북괴를 방문, 김일성과 김정일을 찬양하는 등 반국가적 행위를 하고 있어 국제태권도연맹 전요원의 총의로 그를 추방키로 했다”며 세계태권도연맹과 통합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최홍희는 김일성을 찬양하는 등 반국가적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그는 북한에 간 것은 위기에 놓여 있는 “태권도를 살리기 위해서였다”며 이렇게 해명한다.

“빨갱이 소리를 들어가며 북한을 자주 다닌 것도 결코 남한보다 더 정들어서가 아니라 북한을 통해 올바른 태권도를 사회주의 국가와 제3세계에 보급함으로써 나의 꿈을 실현하자는 데 있었다. 그런 까닭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아듣도록 ‘태권도는 어떤 개인이나 국가가 절대 정치적 목적으로 쓸 수 없는 국제무도임’을 뚜렷이 했던 것이다.” <최홍희(1998). 앞의 책. 407-8쪽>

하지만 김일성을 호의적으로 생각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최홍희는 김일성이 쓴 회고록을 읽어보고 나서 북한의 인민들이 왜 김일성을 흠모하는지 알게 됐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김일성은)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다. 겸손하면서도 남다른 강한 의지와 포용력이 있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지혜와 의견을 들르면서 민심을 장악한다 (…) 그런 까닭에 김 주석은 국민들로부터 절세의 애국자, 위대한 수령 혹은 어버이 수령님으로 불린다고 나는 생각했다 (…) 나는 사상과는 관계없이 민족적 입장에서 그에게 수여된 대원수 칭호를 진심으로 축하했다 (…) 어느 누구를 신격화하거나 전지전능하며 전무후무한 영재라고 생각해 본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반면 김 주석이 일제시절부터 나라를 되찾기 위한 줄기찬 투쟁에 청춘을 바친 애국심과 탁월한 영도력에 대해서는 누가 무어라 하든 나는 존경하며 높이 평가했다.” <최홍희(2005). 앞의 책. 423-4쪽>

김일성을 전지전능한 신으로 추앙하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민족주의에 입각한 애국심과 탁월한 영도력은 존경한다는 말 속에는 오해와 논란의 소지가 다분하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독재자, 동족을 학살하고 정권을 약탈한 악인(惡人)으로 규정하면서 김일성에 대해선 존경하고 높이 평가한다고 말한 대목은 그의 친북 성향을 방증(傍證)해 주고 있다. 하지만 그는 한국의 군사정권이 자신을 ‘친북파(親北派)’라고 뒤집어씌웠다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각 언론매체를 통해 당당히 공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53년 최홍희 부관으로 복무하면서 30년간 최홍희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던 남태희도 이 무렵 최홍희와 결별했다. 남태희의 증언.

“최홍희 장군이 북한으로 가자고 했었다. 같이 가자고 계속 권유했는데 고심을 하다가 가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6.25전쟁을 통해 적으로 대치하며 싸웠는데 북한으로 갈 수는 없었다. 기 이후 최 장군과의 인연은 끊어지게 됐다.” <태권도. 2010년 6월호. 대한태권도협회. 107쪽>

어쨌든 1980년대 초‧중반에 이르자 최홍희를 충직하게 따르는 사범은 10여 명에 불과했다. 그는 그 이유를 한국정부와 세계태권도연맹이 국제태권도연맹을 파괴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기 때문이라고 인식했다. 국제태권도연맹 사범들을 압박하고 매수공작을 일삼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국제태권도연맹 사범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한국에 있는 그들의 가족들과 친척들에게 갖은 압력을 가해 국제태권도연맹은 해산되었다는 허위선전을 하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국제태권도연맹 파괴하고 약화시키는데 혈안이 되었다고 분개했다. <네이버 지식in. 2011년 8월 17일. ITF 태권도 18년의 세월 그리고 태권도사>

최홍희는 1985년 집필을 시작한 지 13년 만에 『태권도 백과사전』을 발간했다. 그는 “태권도는 그 어떤 무도나 무술보다도 기술이 월등하다고 호언장담한 것이 확실히 입증되었으리라 믿는다”며 기뻐했다. 총 15권의 이 책은 4×6배판으로 한 권당 평균 350쪽에 달했다. 최홍희는 “내가 이 책을 꼭 써야 되겠다고 결심하게 된 근본 이유는 나의 기술과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다 아니다. 미 무도를 창시한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느낀 데 있다”고 말했다. <최홍희(1998). 앞의 책. 346-7쪽>

최홍희는 1980년대 중‧후반 아시아, 아메리카, 유럽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86년 6월 북한과 중국이 무술단을 교류할 때 조선태권도시범단을 인솔하고 중국에 갔다.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하던 1980년대 초부터 중국 진출에 관심을 기울여온 최홍희는 중국에서의 시범 공연을 계기로 1987년부터 장춘과 하얼빈 등에서 태권도사범요원교육을 실시했다. 우즈베키스탄과 헝가리, 소련 등 공산권에도 태권도를 보급하기 위해 열심이었다. 1987년 5월에는 제5회 ITF 태권도세계선수권대회를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6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는 1988년 4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각각 개최했다.

최홍희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며 월권과 배신행위를 하면 측근이라고 해도 용서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일이 1990년 일어났다. 최홍희는 심복이나 다름없었던 ITF 사무총장이었던 박정태를 제명했다. 왜 그랬을까? 두 사람의 반목은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듯하다. 최홍희는 북한에서 태권도 사범을 양성하는 과정에서 박정태가 자신을 음해하고 다녔다고 생각했다. 그는 제3자를 통해 박정태가 자신을 가리켜 독재를 한다느니 노망이 들었다느니 하는 말을 전해 들고 발끈했다. 최홍희의 후일담.

박정태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배신행위를 했지만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기른 정을 버릴 수가 없어서 나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죽을죄를 지었으니 살려달라고 하면 죵서해 줄 생각에서 시간을 끌었다 (…) 그러나 상황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끔 급변했다 제갈공명이 울며 마속의 목을 잘라 전군에 사과했듯이 ITF를 살리기 위해 박정태를 즉시 제명처분하였다.  <최홍희(1998). 앞의 책. 443쪽>

1990년대 초 최홍희는 북한과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중국과 소련에 ITF 태권도를 보급하는 일에 전념했다. 1990년 4월에 열린 통일유럽태권도연맹 임시총회에 참석해 1991년부터는 미주와 유럽에서 직접 실시하던 국제사범교육의 횟수를 대폭 줄이고 중국과 소련의 태권도 기술향상에 노력을 집중하기로 했다. <최홍희(1998). 앞의 책. 446쪽>

최홍희는 1991년 북한에 또 갔다. 김일성 79회 생일 축하공연에 간 그는 그 자리에서 김일성을 만나 자신이 저술한 『태권도 백과사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태권도를 하면 건강해지고 자신력이 생기므로 대중화하고 누구든 볼 수 잇도록 작은 책자를 만들어 내라”고 당 간부들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최홍희는 “10년간 내가 희망하던대로 이제 2천여 만 명 북한 인민 전체가 태권도를 하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라며 감복했다. <최홍희(1998). 앞의 책. 474쪽>

1992년은 최홍희에게 기쁨을 많이 줬다. 1990년 판 기네스북에 이어 브리태니카 대백과사전도 1992년부터 최홍희를 ‘태권도 창시자’로 기록했다.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을 보면 ‘태권도 창시자인 남한의 최홍희 장군이 1955년 제출한 이름이 채택된 이후 공인되었다’고 수록되어 있다. 최홍희는 “이것만으로도 태권도가 얼마나 유명하고 빨리 보급됐는가를 알 수 있겠으니 이 무도를 창시한 나로서는 이 세상에 난 보람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고 감복했다. 하지만 그가 ‘태권도 창시자’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 해 9월에는 제8회 ITF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가 북한 평양에서 열렸다. 김일성이 참관한 가운데 태권도전당 준공일에 맞춰 열린 이 대회에는 66개국 선수와 임원들이 참가했다.

1993년에도 최홍희의 강행군은 계속됐다.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등지를 돌며 ITF 태권도 보급에 열을 올렸다. 당시 그는 태권도 기술의 우월성과 단증의 권위는 ITF가 WTF보다 몇 배는 높다고 여겼다. 태권도의 정통성도 ITF가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는 종교보다 더한 믿음이었다.

최홍희는 ‘ITF가 WTF에 흡수통합된다’ ‘ITF는 해체된다’는 언론의 보도와 소문에 강하게 대처했다. 그는 ITF에 소속되어 있는 태권도인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1994년 2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 내가 국제태권도연맹을 해체하면서라도 세계태권도연맹에 들어가려고 한다는 조작된 보도를 한 것은 우리 국제태권도연맹을 내부로부터 와해시켜 보려는 한국 위정자들의 불순한 정치적 모략책동의 일환이다. 나는 세계태권도연맹 총재와 그를 조종하고 있는 안기부의 이와 같은 장난을 우리 태권도 내부에 대결과 반목을 조장시키고 민족의 단합과 나라의 통일을 저해하는 용납못할 범죄로 단정하며 이를 4천만 태권도인들의 이름으로 단호히 규탄하다. <최홍희(2005). 앞의 책. 443쪽>

당시 최홍희의 마음 속에는 WTF의 악랄한 책동 때문에 정통태권도의 본산인 ITF는 온갖 고생을 겪어 왔고, 그런 까닭에 ITF를 헐뜯고 외면하는 한국의 기관과 권력을 비난할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이 짙게 깔려 있었다. 특히 세계태권도연맹 총재인 김운용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했다. 최홍희는 “체육기자들을 마음대로 매수할 수 있는 김운용이 원흉이다. 그는 정부와 체육계에 자기의 실력을 과시함으로써 태권도가 아직도 올림픽에 들어가지 못한 데 대한 책임 추궁을 잠시나마 면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최홍희(2005). 앞의 책. 441쪽>

김운용도 ITF와 최홍희에 대한 반감은 심했다. 그는 “WTF가 75년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에 가입할 때, 태권도가 IOC 승인종목이 될 때, 올림픽 정식종목이 될 때마다 방해공작을 했다. WTF가 국제공인기구가 되고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이 되면서 ITF는 힘을 잃어갔다”고 말했다. <김운용(2009). 현명한 사람은선배에게 길을 찾는다. 중앙 books>

이처럼 1994년은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 여부를 둘러싸고 WTF와 ITF 간의 신경전이 대단했다. 두 단체 간의 날선 공방은 갈수록 격화됐다. 최홍희는 WTF에 대해 가라테 동작을 모방한 ‘가짜 태권도’라며 힐난했다. 그러던 1994년 9월 4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03차 IOC총회에서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WTF는 환호했다. 김운용은 “파리 테팡스에 있는 IOC 총회장 주변과 집행위원 숙소에는 북한 공작원들과 ITF 사범들이 몰려와서 IOC 위원들 방에 매일 WTF 비방문서를 넣었다”고 북한의 지원을 받은 ITF가 방해공작을 했다고 말했다. 이는 ITF 총재 최홍희가 1980년부터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하며 북한과 밀접하게 지냈던 사실이 따른 것으로 보인다.

WTF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WTF가 추구하는 태권도가 단독으로 올림픽 정식종목이 되는 것을 반대했던 최홍희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는 “비록 사이비 태권도 단체인 WTF에 의해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들어갔지만 ‘태권도’ 세 글자는 틀림없이 들어갔으니 창시자인 나 자신은 물론이요 우리 후손을 위해 실로 기쁜 일이다”며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김운용(2009). 앞의 책. 217-218쪽>

1990년대 말, ITF는 태권도 명칭을 제정했다는 의미에서 4월 11일을 ‘태권도의 날’로 정하고 해마다 기념행사를 가졌다. 이를 ‘4월 모임’이라고 했다. 최홍희는 1997년 ‘4월 모임’에 참석하고 태권도 교육영화 제작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국제무도경기위원회 활성화도 꾀했다. 1998년에는 회고록인 『태권도와 나』를 발간해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이 무렵 최홍희는 정우진, 정순천 등 주위의 권유에 따라 한국을 방문하는 준비를 했다. 그는 정우진을 통해 대통령 김대중에게 방한 의사가 담긴 서한을 보냈다. “태권도야말로 코리아를 상징하는 최고의 상품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박정희, 전두환 등 개인을 증오했을지언정 절대로 한국 정부 자체를 반대한 입장은 아니었다”며 방한이 성사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방한은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 정부 입장에서는 그는 여전히 ‘반정부인사’였다. “안기부가 마치 죄인을 취조하는 식의 질문을 보내왔다”는 최홍희의 말 속에 방한이 무산된 속사정을 엿볼 수 있다.

2000년 1월, 최홍희는 <태권도신문>에 ‘태권도는 세계 평화에 기여해야 한다’는 요지의 신년사를 팩스로 보내 왔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상적인 인류사회의 건설을 위해 만들어진 태권도는 나날이 성장하여 지금은 지구촌 어디에서나 수많은 태권도 수련생과 애호가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태권도는 스포츠가 아니라 동양사상에 근거한 철학과 민족정신에 기초한 순수 무도이며 임기응변의 스포츠인 가라테식 사이비 태권도는 이제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없다. 태권도 24틀의 마지막 틀인 ‘통일’은 우리 민족의 간절한 염원인 통일을 상징하는 틀이다. 원컨대, 새 천년 새 세기를 맞아 반세기가 지나도록 아직도 분단되어 있는 조국의 통일을 기하기 위해 힘껏 노력해야 한다. 고귀한 무도인 태권도가 세계 평화와 복리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적극 보급하는데 앞장 서 주기를 바란다.

스스로 ‘태권도 창시자’라고 하는 대목에서 그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또렷히 알 수 있다. ‘임기응변의 스포츠인 가라테식 사이비 태권도’는 평소 그의 논리를 봤을 때, 한국 주도의 WTF를 여전히 비토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최홍희는 ITF는 무도를 지향하고, WTF는 스포츠를 지향한다고 확신했다.

“나는 태권도를 무도라고 생각하고 있지. 내가 만들 당시에도 이것은 단순히 상대를 이기는 것에 목적을 둔 스포츠가 아닌 이기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야. 스포츠와 무도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은 (국제태권도연맹이 가입되어 있는) 세계무도연맹의 성격을 봐도 알 수 있고….”  <월간 말. 2000년 9월호>

최홍희는 2000년 8월 KBS TV <일요스페셜>과 가진 인터뷰에서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태권도 통합을 이루겠다”고 말했다. 최홍희는 WTF와 ITF의 통합에 대해 ‘先통합-後이해점 타결’을 제안했다. 두 기관이 통합 선언을 한 뒤 통합위원회를 결성해 이해점을 타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홍희의 이 같은 소신은 2001년 11월 남북태권도통합연구팀이 그를 심층 면담한 내용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승훈 경문대학 교수는 남북태권도통합연구팀 소장인 오노균 충청대학 교수의 주선으로 11월 28일일부터 12월2일까지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최홍희를 만나 심층면담을 했다. 이 면담에서 그는 남북한 태권도 통합의 과정에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130회원국 중 하나가 북한 조선태권도위원회 소속 북한태권도이다. 통합과정에서는 기술의 통합문제가 필요하다. 매년 세미나를 협회에서 해야 한다. 통합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첫째 단일팀을 만든다. 둘째 기술을 통일시킨다. 그리고 서로 서로 기술교류를 해야 한다. 단일팀 구성은 여기서 말할 수 없다. 김운용 총재와 둘이 만나야 한다. 둘 다 국제기구니까 말이다. 그리고 먼저 통합하는데 원칙만 합의하자. 그리고 통합선언을 한 다음 보고 올리고 동수위원회를 내서 장소, 여러 가지 행정절차, 단증 등 한 단계 한 단계 합의하여 풀어나가야 한다. 회원국 수가 다르기 때문에 동수로 내기 어렵다. 나라수보다 기술이 다른 것이 문제다. 똑같은 기술을 해야 서로 멤버라고 한다. 기술이 다르면 정통 태권도가 아니다. 기술이 같아야 한다. ITF 회원 130개국은 태권도 기술이 똑같다. 단일화, 획일화되어있다. 총재의 몸에서 나오는 기술과 똑같이 한다. 틀 속에 맞서기는 태권도의 조그마한 한부분의 하나다. 태권도 동작의 의미가 진정한 예술이다. 그러나 미국WTF와 유럽 WTF가 사범에 따라 기술의 차이가 난다. 김운용 총재는 태권도 기술을 모른다. ITF는 가르칠 태권도 기술 재료가 많다. 캐나다에 망명하여 태권도 기술을 과학화하고 책을 저술, 태권도 기술을 발명하는데 하늘이 도왔다. 박정희가 고맙다. 태권도 발전을 위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결과적으로 도왔다. 순자는 ‘불도 물도 자기가 쓰기 나름’이라고 하였다. <남북태권도통합연구팀(2001). 남북한 태권도 통합 방안에 관한 연구 심층 면접 질문지. 미간행>

최홍희는 WTF와 ITF는 같은 국제기구이니 통합선언을 한 다음 동수위원회를 구성해 통합문제를 풀어나가자고 했다. 이에 대해 이종우는 “가당치도 않은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인정하고 있는 단체는 WTF지 ITF가 아니다. WTF가 ITF를 흡수하면 모를까 화해와 통합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ITF는 북한 태권도가 아니라 단지 최홍희 개인의 조직일 뿐이다. ITF을 인정하고 협상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이행웅씨가 이끌고 있는 미국태권도협회(ATA)도 협상의 대상이 돼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최홍희는 남북한 태권도 통합을 위한 방안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ITF는 언제든지 통합준비가 되어 있다. 북한은 전 인민이 태권도를 하니까 사범들의 기술이 똑같다. 태권도 통합을 위해서는 기술이 똑같아야 한다. 북한은 태권도에 관한 한 ITF의 내 인준에 의해 움직인다. 태권도 통합은 국내 문제가 해결되어야 국제 문제가 해결된다. 또한 국제 문제가 해결되어야 국내 문제가 해결된다. 9개 나라가 합법적으로 ITF를 만들었고, 국제태권도연맹이 먼저 만들어졌기 때문에 분명 국제기구이다. 한국의 WTF하고는 다르다. 이남석이가 월드(world)로 하자고 하여 WTF로 만들었다. 김운용 총재와 만나서 단계적으로 통합하자. 먼저 원칙만 합의하고 올림픽에 같이 출전하도록 하기 위해 동수위원회를 구성하고 합의하여 통합하자. 그리고 ITF 태권도는 3200여 개의 동작으로 손동작 2,000개, 발 1200개 동작이 있다. 제3자, 방청객 등 청문회 식으로 모든 태권도인이 옳다고 하는 기술 즉 모든 사람들에게 오픈시켜 WTF, ITF의 태권도 기술 평가를 받자. 태권도는 부모가 준 몸둥이가 무기이다. 즉 부모가 낳아준 손발이 무기다. 도를 모르기 때문에 쌍절권 등 무기를 가지고 하는 것은 안 된다. 그것은 태권도 기술이 아니다. 석가여래, 즉 인도에는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불도는 없다. 이스라엘은 예수교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예수를 믿지 않는다. 한국은 태권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진정 태권도하는 사람은 없다. 무도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나는 화장실부터 모든 장소가 태권도를 가르칠 수 있는 도장이다. 진정한 사범을 만들어내야 하니까 최홍희는 개인 도장이 없다. 개인도장을 만들지도 않았다. 태권도 기술을 15년 잘못배우면 고치려면 15년 걸린다. 10년 잘못 배우고 고치려면 10년 걸린다. 성인이 아니면 성인을 알지 못한다. 그림을 보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림의 수준을 평가하지 못한다. 태권도 기술이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말하지 마라. <남북태권도통하변구팀(2001). 최홍희 심층면담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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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홍희 ITF 창립자가 2000년대 초에 열린 세미나에서 시연을 하고 있다.

ITF는 2002년 세력 구도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당시 최홍희는 ITF 총재직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자 자신과 입장이 달랐던 친아들 최중화(당시 lITF 사무총장)와 반목이 싹터 2001년 1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ITF 특별총회에서 등을 돌렸다. 이날 총회에서 2003년 7월까지 예정된 최홍희의 총재 임기를 2007년 7월까지 4년 연장하는 안(案)이 통과되자 최중화 측이 반발했다. 최홍희는 2000년 로마 ITF 회의에서 ‘2년 후 아들을 총재 자리에 앉히겠다’고 공포했는데, 최중화 주변의 사람들이 마치 새로운 총재를 모시 듯 그를 대하며 설쳐댔다. 이 일로 비엔나 총회에서 최홍희 묵인 아래 최중화가 제명 처리되고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정우진(2002). 세계가 우리를 기다린다. 행림출판. 366쪽>

이와 관련, ITF 대변인은 성명서를 통해 “최중화 사무총장은 무도인으로서 도덕 윤리적인 본분을 망각하고 ITF 규율을 문란하게 하였으므로 총회에 참가한 회원 전원의 결정에 따라 그를 사무총장직에서 해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최중화 측은 최홍희의 세금포탈 혐의 등을 제기하며 ITF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최홍희 측에 반기를 들었다. 최중화는 최홍희와의 갈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께서 항상 말씀하셨다. 넌 태권도를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태권도를 잘 간직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자라면서 이것이 나의 운명이라고 알고 ITF 사무총장직을 맡았다. 그때 아버님과 정책에 대한 다른 의견이 몇 번 있었다. 이 자체가 부자지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견의 충돌이었지 다른 것은 없었다. 물론 아버님과 내 사이가 멀어지면 그 기회를 이용해 ITF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태권라인. 2007년 10월>

부자(父子) 간의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2년 5월 북한에서 위암 치료를 받고 최홍희가 캐나다 토론토공항에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자 최중화는 아버지와 어머니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의 목을 비비면서 잘못했다며 용서해 달라고 통곡을 했다. 최홍희의 눈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평양에서 위암 수술을 받았지만 최홍희의 병세는 회복되지 않고 더욱 악화됐다. 정순천의 후일담.

위암수술을 받고 캐나다로 돌아온 최홍희 총재의 얼굴은 예전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 때부터 죽음은 그에게 가깝게 다가오고 있는 듯했다. 그 해 4월 최 총재의 수제자였던 박정태 GTF 총재도 세상을 달리했다 (…) 그는 서재에 있는 태권도 자료들을 하나 둘 씩 정리하면서 하나도 빠짐없이 복사하기 시작했다. 최 총재는 평생을 연구하고 수집한 태권도 자료들을 평양의 태권도전당에 기증하려고 결심한 듯했다. <정순천. ITF연구소. 2006년 10월 10일>

최홍희는 남한과 북한 중 어디에서 숨을 거두고 싶어했을까? 북한이 아닌 남한에 가고 싶지는 않았을까? 정우진의 증언.

캐나다에 살던 최 총재는 위암 판정을 받았고, 이미 물조차 소화시킬 수 없을 만큼 병세가 나빴다. 최 총재는 북한에서 위 수술을 하고 난 직후 콜로라도 덴버에서 열린 태권도 세미나에 휠체어를 타고 참석했다. 죽음을 앞두고서도 태권도를 사랑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모든 참석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최 총재는 ‘조국은 하나다. 나는 코리아에 내 뼈를 묻고 싶다’고 늘 말해 왔다. 그 뜻을 이루어주기 위해 최 총재의 허락을 받아 2002년 5월 3일 태권도타임즈와 무도연금의 이름으로 한국과 북한당국에 각각 공문을 보냈다 (…) 이 공문은 ‘남과 북 어느 쪽이든 최 총재를 불러주는 곳에서 둘로 갈라진 태권도의 통합을 위해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겠다’는 뜻을 밝히고, 그 수용 의사를 묻는 내용이었다. <정우진(2002). 앞의 책. 366쪽>

북한에서는 최홍희를 받아주겠다고 했으나 한국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밝혀 왔다. 독립유공자 인정 여부에 대해서도 ‘국가보훈처에서 심사 중’이라는 회신을 보내왔다. 최홍희가 갈 곳은 북한 밖에 없었다. 그는 2002년 6월 15일 평양에서 숨을 거두었다. 타계하기 전 그는 ITF 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민족고유의 무도인 태권도를 하나로 만들어라 △태권도 보급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온 ITF 회원들에게 고맙다 △나는 일평생 태권도 창시와 보급을 위해 힘들게 싸워 왔지만 피곤하지 않고 행복하다 △북한의 장웅 IOC 위원을 나의 후계자로 삼아라 △아들 최중화를 아버지로서 인정하지만 공적(公的)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는 등의 유언을 남겼다. 최홍희의 장래식은 장웅과 황봉영을 포함한 14명으로 구성된 장래위원회에 의해 3일장으로 치러져 평양 열사능에 묻혔다. 최홍희는 생전에 ‘태권도 창시자’라는 비문(碑文)을 원했지만 북한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ITF 후계자로 장웅을 지목한 것에 대해선 아직도 논란이 많다. <태권라인> 기자 채수용은 최홍희가 타계하기 전 장웅을 후계자로 지목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최홍희 총재는 무도단체의 수장은 무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다. ‘정치인은 무도를 모른다. 태권도하는 사람이 농구코치를 할 수 있는가?’라고 말로도 증명된다. 그러나 이런 사실도 모른 채 수 년이 훨씬 넘은 지금 이 시점에서 장웅을 옹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최 총재의 유언장에는 또 다른 의문들이 남아 있다. 특히 황광성이 번역한 유언장 마지막에 ‘이 사실을 인터넷을 통해 알려라’라는 말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최 총재의 주변인들은 누구나 그가 인터넷을 모르고 살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최 총재는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이었다. 그런 그가 인터넷을 논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울러, ‘공항에서 최중화가 나를 또 한번 속였다’라는 말은 단지 당시 최중화 사현이 반북 의사를 명확히 밝혔던 것 사실을 북한 체제의 유지를 위해 극대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태권라인. 2007년 5월>

이 같은 논란에 대해 ITF 수석 부총재를 역임한 이기하는 “아들(최중화)이 ITF를 물려받으려고 시도했지만 최홍희 전 총재는 김운용 IOC 위원과의 태권도 통합 논의를 염두에 두고 지명도가 높고 교섭력을 갖고 있는 장웅 IOC 위원을 총재로 지명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2002년 6월 15일 평양에서 최홍희가 타계하자 미국과 캐나다 지역에서 그의 추모식이 열렸다. 미국 중서부의 무도인 50여 명은 시카고에서 추도 모임을 갖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러나 국내 태권도인들은 그의 죽음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와 30년간 대립각을 이뤘던 세계태권도연맹 측은 그의 죽음과 관련해 어떠한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WTF와 ITF의 이념 갈등을 떠나 최홍희를 한동안 보필해온 정우진은 이렇게 토로했다.

최홍희라는 이름 석 자와 그가 설립한 ITF는 한국정부로부터 철저하게 외면을 받아 왔다. 특히 최 총재가 북한을 방문하여 태권도를 보급하기 시작한 1980년 이후에는 아예 ‘최홍희는 빨갱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고 말았고, 이 등식이 성립되는 한 ITF와 최 총재는 한국정부와 한국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였다. <정우진(2002). 앞의 책. 3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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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최홍희를 추앙하는 한 태권도인이 마련한 최홍희 신위

이런 가운데 이념을 떠나 최홍희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나영일 서울대 교수는 2006년 11월 29일 국기원이 주최한 ‘태권도 역사-정신 연구 세미나’에서 “남한을 배척했다고 해서 최홍희가 사망한 지금까지도 백안시한다는 것은 조금 지나친 처사이다. ‘태권도’라는 이름을 새롭게 만들어낸 최홍희의 공(功)은 크다. 그렇다고 태권도를 그가 홀로 창시했다고 하는 것도 역시 지나치다”고 밝혔다. <태권도진흥재단으로부터 국기원연구소가 위탁을 받아 작성한 보고서. 연구위원은 책임연구원 이규석, 공동연구원 이승환 한형조, 안용규, 나영일, 노영구, 안근아>

태권도 원로 박철희의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 ‘태권도 창시자가 누구냐’라고 묻는 것 자체는 태권도의 창시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스운 일인지는 모르지만 현재 그런 이야기들이 빈번하게 제기되고 있어,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할 듯하다 (…) 최홍희씨는 자기 자신이 태권도를 창시했다고 한다. 이 말이 옳은 말일까? 그의 주장을 인정하게 되면, 현재 태권도를 하는 모든 사람이 최홍희라는 사람으로부터 태권도를 배웠다는 것이 되는데,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우선 나는 그에게 태권도라는 무예를 배워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술 기범 하나 배워본 적이 없다 (…) 그가 태권도라는 명칭을 만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태권도를 창시한 것은 아니다.”  <허인욱(2008). 앞의 책. 240-1쪽>

이경명은 최홍희가 태권도를 창시했다는 주장을 반박하면서도 “그가 ‘태권’ 무도 개명에 기여한 공로는 물론 그의 생애가 태권도적 삶이었듯이 태권도의 발전에 큰 공적을 남겼다는 것은 사실이다”고 평한다.

최홍희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만든 ITF 태권도를 수련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성인 태권도 활성화를 추구하고 있는 김재훈은 창헌류를 적극 보급하고 있고, 서울 구로에 있는 ITF-KOREA는 ‘북한=ITF’를 경계하면서 ITF 활성화를 지속적으로 꾀하고 있다.

한편 태권도진흥재단은 2016년 최홍희의 태권도 공로를 인정해 ‘태권도를 빛낸 사람들’ 헌액 대상자로 선정했다.

<서성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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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

  1. 서기자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역사를 등한시하는 요즘 시대에.. 큰 역할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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