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중순 진승태 교수가 천안 단국대 연구실에서 학생 교육에 대한 소신을 말하고 있다.

[알림] 대한태권도협회가 발간하는 태권도 잡지 2018년 11-12월호에 게재된 ‘레전드 플레이어 : 진승태 선수’ 전문을 싣습니다. 취재와 글은 서성원 기자가 했습니다. 제공=대한태권도협회

1999년 은퇴 후 미국에서 도장경영 성공, 단국대 교수로 활동
태권도 생활체육 가치 깨닫고 학생들 ‘글로벌 안목’ 키워주는데 전념

1997년 11월, 홍콩 콜리세움에서 열린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남자 플라이급 결승에서 한국의 진승태(陳昇泰·25) 선수가 대만 선수와 맞붙었다. 진승태는 경기 초반 기선을 빼앗겨 고전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경기력을 발휘해 3-2로 역전승을 했다. 경기 후 진승태는 “도복을 벗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각오로 경기에 나갔는데 좋은 결과가 나와 기쁘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로써 그는 1993년과 95년에 이어 97대회에서도 우승해 3연패 위업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핀급에서 한 체급 올려 플라이급에 도전한 모험이 완벽하게 성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컸다. 경량급 세계 최강자로 입지를 굳혔기 때문이다. 작은 체구, 선한 인상, 차분한 성격의 진승태 교수가 1990년대 경량급 최강자로 군림한 까닭은 무엇일까?

늦가을 정취가 완연한 11월 19일 오후,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에서 진승태 교수(46)를 만나 선수 시절의 추억과 보람, 미국 이민생활의 고충과 성취, 그리고 현재 교수 생활의 목표와 바람 등을 들어보았다.

#초등 선수시절부터 아버지 헌신적 뒷바라지
진승태 교수의 고향은 전북 전주. 유년시절 태권도를 시작한 그는 완산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겨루기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 진헌부 씨는 그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다. 아들을 위해 특별한 날은 제외하곤 4㎞를 뛰게 하며 기초 체력을 길러줬다. 또 선수로서 지녀야 할 됨됨이는 물론 냉혹한 승부 세계에서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며 강인한 근성도 심어줬다.

“6살 때 태권도를 시작했어요. 동네 상무관에서 아저씨들이 태권도를 했는데, 어린이 프로그램도 있었어요. 마냥 태권도가 재미있어 아버지를 졸라서 태권도 선수생활을 했어요. 아버지는 ‘열성 학부모’였어요. ‘진승태’하면 아버지가 따라 다닐 정도로 뒷바라지를 열성적으로 하셨죠.”

진 교수 아버지는 그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인근 완산중·고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시키며 체격과 신장이 좋은 선수들과의 승부에서 자신감을 갖도록 했다. 1m68㎝의 진 교수가 훗날 세계대회에서 장신의 유럽선수들을 만나면 소극적으로 경기를 하지 않고 적극성을 보인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경남체고 3학년 때 첫 태극마크 달고 승승장구
완산중에 진학한 진 교수는 3년 동안 소년체전 금·은·동메달을 1개씩 획득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뒀다. 경량급에서 차세대 기대주로 떠오른 건 당연했다. 하지만 완산고에 진학하면서 발목이 잡혔다. ‘체육고’에 진학하는 것이 그의 미래를 봤을 때 당연했지만, 집안에선 선수도 공부를 해야 한다며 인문계 고교 진학을 권했고, 완산고에 간 것이 결국 패착이 되었다. 같은 태권도부 동료 선수와 체급이 겹치는 등 여러 문제가 겹치면서 훈련에 집중할 수가 없었던 것. 그 당시엔 마음 속으로 혼자 삭혀야 하는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다.

결국 진 교수는 완산고를 떠나 다른 고교에 둥지를 틀고 국가대표 선수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이적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진 교수의 강인한 의지와 여러 정황이 맞아 떨어져 고교 2학년 때 경남체고로 전학을 갔다. 이적 규정상 6개월 대회에 출전하지 못한 진 교수는 고교 3학년 봄에 열린 전국종별선수권대회부터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42kg으로 핀급에 출전해 1위를 한 그는 그 해 7월 국기원에서 열린 제1회 대한체육과학대학장기(현 용인대) 전국남녀태권도대회 남고부 핀급을 우승하며 ‘고교 A급’ 기대주로 각광을 받았다.

그리고 경남체고 3학년 때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가슴에 단 뒤 1992년 초에 열린 제10회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에 출전했지만 은메달에 머물렀다.

“1992년 초 한국체육대학교에 들어가기 전 처음으로 국가대표선수가 되어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했어요. 그런데 국제경험이 처음이었던데다 결승에서 만나 대만 선수(장준산)의 노련한 경기운영에 말려 2위를 했어요. 하지만 2년 후 94월드컵대회에서 또 만났을 때는 완승을 했습니다.”

1997년 홍콩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를 마치고 동료 선수 김제경-정명숙 선수와 함께.

#아시안게임 金획득-세계선수권 3연패
비가 온 뒤에 땅이 단단하게 굳듯이, 한국체육대학교에 진학한 후 진 교수는 승승장구했다. 1993년 제1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 이어 1995년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거푸 핀급 정상에 올랐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핀급 지존’이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95세계선수권대회 4강전에서 카를로스 차모르(스웨덴)를 4-0으로 꺾고 결승에 오른 뒤 필리핀의 로베르토 크루스를 주특기 앞발 들어차기로 공격해 2-0으로 가볍게 이긴 것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이러한 상승세를 바탕으로 1994년 8월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1995년 1월, 한국체육대학교 시절 제8회 이란혁명기념 국제태권도대회에서 첫 금메달을 획득한 진 교수는 1996년 9월에 열린 제5회 국방부장관기태권도대회에서 김봉찬(상무)를 제치고 플라이급 금메달을 획득하며 전성기를 이어갔다. 치밀한 작전 속에 상대방의 약점을 파악하고 민첩하게 공격하는 그의 왼발 돌려차기는 일품이었다.

물론 그도 여느 선수들처럼 슬럼프와 좌절의 시간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강한 신앙의 힘과 가족들의 응원으로 고난의 시간을 이겨냈다. 그 당시 그의 집엔 그동안 흘린 땀과 노력의 열매인 각종 상패와 훈장, 메달이 가득했다. 대통령으로부터 체육훈장(거장상)을 받는 영광은 쉼 없이 달려온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은퇴 기로 속 선수생활하며 공부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과 95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진 교수는 선수 생활에 미련이 없었다.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보다 평소 하고 싶었던 학업에 전념하면서 해외에 진출해 견문과 안목을 넓히고 싶었다.

“저희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영문을 전공했어요. 할아버지는 일본 와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아버지도 영문학을 전공해 영어회화를 잘하셨어요. 그런 집안의 영향으로 저도 어릴 때부터 영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른 태권도 선수들과는 달리 외국 선수들을 만나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등 소통하고 교감하는 것이 적성에도 맞고 좋았어요.”

1996년 진 교수는 선수생활을 은퇴하고 모교인 한체대에서 석사학위 공부에 전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제의가 들어왔다. 1996년 진로실업팀이 창단되면서 ‘러브콜’이 들어왔다. 당시 진로실업팀 감독의 강력한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정국현 감독님이 저를 찾아와 부탁을 했어요.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않아도 되니까 우선 팀에 들어오라고요. 그래서 학업을 병행하면서 선수생활을 했는데, 진로실업팀이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어요. 그 후 한국가스공사실업팀이 창단되면서 제가 입단하기를 원해서 소속팀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후배 선수들과 경쟁해서 97세계선수권대회 플라이급 국가대표선수로 출전했던 거예요.”

세계선수권대회 3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진 교수는 1999년 가을 인천에서 열린 전국체육대회에서 –58kg급 금메달을 획득한 후 미련없이 경기장을 떠났다. 진 교수는 “0.001% 아쉬운 게 전혀 없었다. 20년 동안 선수 생활하면서 좋은 성적도 거뒀고 미련도 없었기 때문에, 해외에 나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미국 생활체육 가치 실감, 도장 6개 경영
미국으로 유학을 가겠다는 포부 속에 파란만장한 선수 생활을 은퇴한 진 교수는 우선 미국 태권도장에서 사범으로 생활하며 학업을 병행할 생각이었다. 그의 마음 속엔 미국 생활에 적응하면서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시야와 안목을 넓혀서 새로운 태권도 인생을 가꿔나가겠다는 신념이 움텄다.

하지만 사범 월급을 받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신이 산만해 집중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에서 느끼지 못한 생활체육의 가치와 중요성을 깨달은 것은 소중한 자산이었다.

“미국에 살면서 생활체육 가치를 실감했어요. 엘리트 스포츠는 소수가 독차지하는 상대평가지만, 생활체육은 다수도 누릴 수 있는 절대평가잖아요. 태권도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태권도 선수들은 대부분 은퇴 후 지도자를 꿈꾸잖아요. 그런데 지도자 생활을 보면 성적제일주의로 스트레스가 심하고 훈련장과 경기장에 주로 있어야 해서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잖아요. 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진 교수는 태권도가 지니고 있는 생활체육 가치를 존중하며 도장경영에 뛰어 들었다. 시행착오를 거치기도 했지만 노스캐롤라이나와 애틀란타에 6개의 도장을 경영하며 태권도장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구축하고 2008년까지 성공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 공허함이 찾아왔다.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집착과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인생을 다시 설계하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렸다.

#2012년 모교 한체대에서 박사학위 취득
2009년, 37살이 되자 그는 결심을 굳혔다.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가서 못 다한 공부, 즉 박사학위에 도전하기로 한 것. 가족과 친척들의 반대하는 것은 당연했다. 태권도장을 6개나 경영하며 남 부러울 것 없이 생활하고 있는데, 교수를 꿈꾸며 박사학위를 취득하려고 하는 진 교수를 이해하지 못할 만도 했다.

하지만 진 교수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제경·김병철·권기문 등 선배들의 격려와 응원 속에 2009년 여름 한국에 돌아와 모교에서 학업에 정진했다. 그리고 2012년 8월, 그동안 노력의 결실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학기 중에는 한국에서 혼자 살면서 공부하고, 방학 때는 가족들을 보기 위해 미국을 오가면서 거둔 소중한 결과였다.

#교수로 새 삶, ‘글로벌 안목’ 키우는데 전념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좋은 기운이 그에게 뻗쳤다. 단국대학교 교수 채용 공고를 보고 응시해 특채로 초빙교수로 임용된 것이다. 그는 “운이 좋았던 것 같다. 평범하지 않은 저의 독특한 라이프 스토리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현재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 스포츠과학대학 국제스포츠학과 조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태권도 겨루기와 호신술 등 실기를 지도하고 있지만 그가 관심을 갖고 집중하는 것은 학생들의 고정관념과 생각의 틀을 깨고 안목을 넓혀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학생들에게 글로벌(global) 안목과 관점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들을 되도록 많이 해외에 진출시켜 넓은 세상을 보고 체험을 통해 안목을 넗혀주고 싶어요. 안목이 넓어지면 생각의 틀도 바뀌고 관점이 달라지거든요. 제가 뒤늦게 느꼈던 것처럼 생활체육의 가치를 일찍 느껴보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힘을 길러주고 싶습니다.”

단국대 국제스포츠학과는 ‘해외 인턴십 교육과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진 교수는 미국 현지 경험을 통해 이미 구축해 놓은 해외 네트워크를 활용해 학생들의 진로를 돕고 있다. ‘해외문화 워크숍’을 통해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 등 특성을 이해하고 취업이 됐다는 가정 아래 현지 적응과 성공을 위한 전략을 학생들과 모색하고 있다.

“저는 학생들이 국가대표 선수가 되거나 지도자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솔직히 저희 대학 여건상 국가대표 선수가 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또 지도자가 되는 것을 반대할 수는 없지만 드넓은 세상에 나가 자신의 꿈을 이루며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인터뷰 후기 ; “술, 담배 안 해요”
진 교수는 학교가 있는 충남 천안에서 혼자 살고 있다. 아내와 아들, 딸은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어 외로울 때도 있다. 그 때마다 그는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며 틈나는대로 가족들과 자주 통화하고 있다. 혼자 저녁식사를 할 때도 있지만 지인들과 학교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즐거움도 마다하지 않는 편이다. 바쁘게 생활하고 있지만 ‘저녁이 있는 삶’을 즐기는 셈이다.

“담배는 끊으셨죠? 술은요?”
인터뷰를 마치며 기자가 물었다.
“담배는 원래 안 피웠고요. 술은 예전에 좀 먹었는데, 요즘은 거의 안 하는 편입니다.”
“그럼 세상을 무슨 맛으로 살아요?”
기자가 재차 묻자 그는 “교회도 다니고 해야 할 일도 많아요”라고 에둘러 말했다.

진 교수는 “내년엔 국제스포츠학과가 국제스포츠학부로 확대 개편하고, 조교수에서 부교수로 승진한다”며 활짝 웃었다.

[학력]
*[1996] 학사 한국체육대학교 체육학과(태권도)
*[1998] 석사 한국체육대학교 체육학과(운동역학)
*[2012] 박사 한국체육대학교 체육학과(태권도)

[연구]
*일반논문[2011] 국내외 체육단체의 윤리경영에 대한 의식 조사
*일반논문[2011] 스포츠센터 종사자의 직무탈진이 조직성과에 미치는 영향
*일반논문[2010] 대학운동부에 대한 관여도와 동일시, 경기관람의도, 후원의도 간의 관계

 

Print Friendly, PDF & Email

4 COMMENTS

  1. 생활체육의 가치를 일찍 느껴보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힘을 기르라는 저말의 크게 와 닿았습니다. 관점을 바꿔보고 스스로 개선해 나가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2. 어떠한 도전이든 이루어내고, 목표 또한 달성하여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이 너무 멋지시고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로운 목표와 도전에서 좋은 결실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포기하지 않는 진념과 자신감이였다고 생각이 듭니다. 도전의 연속인 삶에서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하는지 도움이되는 기사였습니다. 감사합니다.

  3. 한 사람의 인생의 우역곡절이 많았던 부분과 성공담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네요.ㅎㅎ 선수생활 은퇴후 도장경영에 빠르게 성공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던 저의 고정관념을 여기서 깨버리는 것 같네요. 인터뷰에서 미국은 생활체육이 두드러진 모습을 보인다고 했는데, 우리 한국도 현재로서는 도장의 수가 많은 점을 고려해 생활체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네요. 그런데 그 생활체육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현재 도장들이 대중들의 체력과 신체적 기량 향상에 대해 얼마나 성과를 거두고 있는가 하는 점이 조금 아쉽네요 … 우리 한국 도장에도 이 분과 같이 생활체육에 힘쓰는 여러 관장들이 나왔으면 하고 바랍니다.

LEAVE A REPLY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