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후반 20대 시절 이관영 사범이 옆차기를 하고 있다. 사진=이관영 사범

이 글은 대한태권도협회가 발간하는 태권도 잡지 2020년 12월호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편집위원회 허락을 얻어 전문을 싣습니다. 이관영 원로는 ‘이관영’으로 통일해 표기합니다. <편집주>

글=서성원 기자

이관영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아버지가 의사여서 집안은 부유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아버지가 납북되자 외가(外家)에서 자랐다고 한다.

코흘리개 유년 시절, 어깨너머로 태권도를 배웠던 이관영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태권도를 수련했다. 그 곳은 청도관(淸濤館) 소속 도장이었다. 학창시절 공부도 잘해 영어 웅변대회에서 입상하는 등 모범생이었다.

그가 보성고를 졸업할 즈음,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다. 입대를 앞두고 그는 군사원조 일환으로 베트남에 파견된 비전투요원 태권도 교관단에 지원했다. 1966년 주월 백마부대 태권도 교관단으로 활동하면서 모은 돈으로 국민대학교에 입학했지만 1968년 중퇴하고 자신의 미래를 설계했다.

이관영은 청도관 중앙본관에서 태권도를 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후배들에게 자신이 익힌 기술을 전수했다. 청도관 3대 관장 엄운규는 이런 이관영을 ‘수제자’처럼 여기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1967년 청도관 중앙본관 앞에서 이관영 원로가 이단 옆차기를 하고 있다. 사진=청도관

이관영은 발차기는 일품이었다. 엄운규는 2015년 당시를 회고하면서 “뒤돌아 옆차기와 뛰어 이단옆차기는 내가 개발해 잘했던 발차기였는데, 열정과 소질이 있는 제자들이 찾아오면 시범을 하며 가르쳐 주었다. 그 제자 중 한 명이 이관영이다. 발기술을 연마하다가 모르면 나를 다시 찾아오곤 했다”고 말했다.

이관영도 당시를 떠올리며 “예식장 건물을 빌려서 예식이 끝나고 나면 의자를 치우고 마루청소를 한 뒤 태권도를 수련했다”며 “엄운규 관장님의 특기인 이단옆차기를 나도 잘해서 칭찬을 받았다. 수련 중 엄 관장님과 대련을 할 때 이단옆차기를 맞아 바닥에 떨어지면 그 기쁨과 영광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1969년, 이관영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중앙정보부에서 모집하는 공작원으로 뽑혀 수개월 동안 훈련을 받은 후 프랑스에 파견됐다. 공작원 첩보활동과 교민 보호의 임무를 비밀리에 수행하기 위해 ‘태권도 사범’으로 활동했다.

당시 남북 정세는 경색 국면이었다. 1년 전 북한 정찰국 공작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했던 이른바 ‘1.21 사태’로 남북의 대치는 첨예했다. 그런 정국 속에서 이관영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지만 정부가 추진했던 ‘모종의 계획’이 폐기되면서 프랑스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그는 귀국하지 않고 프랑스에 남아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갔다. 한국 정부의 지원이 끊겨 허름한 다락방에서 생활하면서 중식당 접시닦이와 정원관리 등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때로는 퐁 생미셀 다리 밑에서 포도주를 먹으며 거지들과 어울리고, 가라테 사범들에게 도전해서 실력을 뽐내는 등 다난한 세월을 보냈다.

1971년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이관영 원로(가운데)가 대한태권도협회를 방문해 김운용 회장, 엄운규 사무총장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대한태권도협회

귀국해 잠시 숨을 고른 후 이관영은 1971년 해외파견 사범에 지원해 합격했다. 5단 이상이 지원한 시범을 쉽지 않았다. 국어·국사·영어와 태권도 실기시험에서 1등으로 선발되어 프랑스에 파견됐다. 그 후 1975년 5월 국기원에서 열린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 프랑스대표팀을 이끌고 참가하는 등 프랑스에 태권도를 보급하며 국위선양에 기여한 공고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했다.

그의 다채로운 활동을 보고 영화계에서 러브콜을 보냈다. 1975년에는 홍콩영화 감독들에게 스카우트 되어 여러 작품에 출연했고, 이듬해 ‘파라문’이라는 한국 무술영화에 주연배우로 출연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후 배우생활을 정리하고 프랑스로 돌아가 저축한 돈을 모아 파리 중심지에 식당을 차렸다.

1981년 서른 중반에 인생의 변곡점이 찾아왔다. 파리 뒷골목에서 이발소 면도칼을 든 깡패 10여 명을 제압하는 그의 날렵한 모습에 매료된 프랑스 내무부 경찰청이 그를 경호교관으로 특채했다. 이관영은 경찰들에게 사격과 경호, 체포술 등을 가르치며 자연스럽게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프랑스와 관계가 있는 세네갈 등 북부 아프리카를 돌며 태권도를 지도하고 대통령 경호원들을 교육했다.

1991년에는 프랑스 경찰청 형사국 수사관으로 정식 임명된 후 2004년 ‘프랑스 태권도 보급 35주년’ 맞아 성대한 기념식을 가졌다. 제자들이 마련한 이날 행사에는 가랑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달려온 3천 여 명이 1969년 프랑스에 건너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2만 5천 여 명의 제자들을 길러낸 그의 노력과 경륜에 갈채와 환호를 보냈다. 그는 도장을 개관해 운영하다가 제자들에게 넘겨주는 방식으로 프랑스에 태권도를 심었다.

이날 한국과 프랑스의 국가가 울려 퍼지고 파리시장의 감사패도 전달되자 제자들과 관중들은 기립 박수를 보내며 극진한 예우를 표시했다. 이관영도 감회가 남달랐다.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는 “35년 동안 최선을 다했다. 정말 기쁜 날”이라며, 재불한인회장을 역임한 경험을 살려 “외국에 나왔으면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해야 한다. 한인회 역할도 친목 위주가 아니라 프랑스 사회에서 실질적인 협상력을 갖고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대표 단체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프랑스 주재대사는 “제자들이 또렷한 한국말로 ‘차렷, 경례, 시작’ 등의 구령을 외치는 모습을 보니 성공한 민간 외교의 훌륭한 사례”라고 찬사를 보냈다.

최근 이관영 원로의 모습. 프랑스 도장 벽에 스승 엄운규 원로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이관영 원로

이처럼 프랑스에 꾸준히 태권도와 한국문화를 알려온 그에게 또 한 번 잊지 못할 영광이 찾아왔다. 2019년 프랑스 우정공사(La Poste)가 프랑스 태권도 보급 50주년을 맞아 ‘이관영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해외에서 발행한 현지 국가의 우표에 한국인 태권도 사범이 등장한 것은 처음이다. 이번 우표 발행도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자들이 주도했다.

기념 우표에는 50년 전 프랑스에 태권도를 처음 보급한 ‘프랑스 태권도 대부’ 이관영 사범의 상반신 옆모습과 현지 태권도 역사를 기록한 ‘1969∼2019년’, 아래로 ‘이관영’이라는 한글 이름을 새겼다. 우표 맨 아래는 ‘50 ans d’enseignement EN FRANCE’(프랑스에서 50년)라는 프랑스어를 넣었다.

까다로운 심사절차를 거쳐 공익적인 목적으로 기념우표가 발행되자 일흔 넷 백발의 이관영은 감격했다. 그는 “내 얼굴이 새겨진 우표를 보고 눈물이 흘렀다. 그동안 고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가문의 영광이고 교포로서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태권도는 사람을 살리는 무술”이라고 설파해온 그의 인생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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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OMMENTS

  1. 기사을 보고 마음이 . ..
    태권도을 지도하는 한사람으로써 이렇게 훌륭하시고 타국에서 태권도 보급에 기여하신 대사범님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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