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은 경북태권도협회 이사
[알림] 이 기사는 대한태권도협회가 발행하는 태권도誌 2019년 7·8월호에 있는 내용으로, 서성원 기자가 취재·작성한 것입니다.

공부하며 봉사활동 꾸준히
“딸과 품새대회 도전 예정”

“득점이 인정됩니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정재은 선수가 태권도 첫 금메달을 차지합니다.”
TV로 생중계를 하던 캐스터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2000년 9월 28일, 시드니올림픽 태권도 첫 금메달의 영광은 한국 57㎏급 정재은 선수에게 돌아갔다.

스물이 갓 지난 정재은 선수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렇게 말했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기쁩니다. 국내 선발전에서 워낙 강한 상대들과 겨룬데다가 우리나라가 태권도 종주국이어서 반드시 금메달을 따야 한다는 정신적인 부담이 컸는데, 주위 분들의 도움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경기마다 다 힘들었어요. 특히 준결승에서 만난 터키 선수가 제일 힘들었어요. 외국 선수들의 기량이 향상되고 실력이 평준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날 여자 57kg급에 출전한 정재은 선수는 한 템포 빠른 발차기와 매끄러운 연결동작, 지혜로운 경기운영으로 상대 선수와 맞섰다. 준결승에서 터키 선수를 힘겹게 이긴 후 결승에서 베트남 선수(트란히으)를 만났다. 정재은 선수는 1998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베트남 선수에게 패했지만, 그 경험을 토대로 그 선수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정재은 선수는 1회전부터 자세를 낮추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베트남 선수의 돌려차기 를 살짝 피하면서 강하게 받아 차 선취점을 올렸다. 2회전 혼전 중 왼발 얼굴차기로 2점째를 뽑았고, 3회전에서는 침착한 경기운영으로 역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상대 맨 위에 올라 금메달을 목에 걸고 두 손을 높이 들었다.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현재, 그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6월 중순, 경북태권도협회에서 연락처를 받아 연락을 했다. 사회 각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경북태권도협회 이사로 재임하고 있었다.

# “아빠에게 금메달을…” 기대주가 되기까지

정재은 이사는 언제, 어떤 계기로 태권도를 시작했을까?
“초등학교 5학년 때였어요. 친오빠들이 태권도 훈련을 하기 위해 도복을 입을 때 ‘참 멋있다’고 생각했죠. 당시 큰 오빠는 태권도 사범이었고, 작은 오빠는 태권도 선수부에서 주장을 맡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오빠가 부산에서 열린 전국대회에 참가해서 아빠와 함께 오빠를 응원하러 부산에 내려갔어요. 오빠는 열심히 경기를 했는데, 아쉽게 졌어요. 그런 아들의 경기 모습을 카메라로 촬영하는 아빠의 뒷모습이 너무 안쓰러웠어요. 그래서 다짐했죠. 제가 금메달을 꼭 획득해서 아빠의 목에 걸어 드리겠다고요.”

그렇게 정 이사는 태권도를 시작했다. 도장에 나가 태권도를 수련하는 것보다 금메달을 획득하는 것이 목표였다. 초등부 선수 시절부터 꿈은 야무졌다. 금방 전국대회에서 금메달을 딸 거라고 생각했다. 6개월 동안 도장에서 일반 수련생들과 겨루기 기술을 배운 후 태권도 선수부로 옮겼다.

“선수부는 1시간 구보를 하고 발차기와 겨루기 기술 훈련을 했어요. 훈련 첫날, 1시간을 뛰는데 하늘이 노랗다는 걸 처음 느꼈어요. 훈련은 혹독했지만 기본기를 정확히 배울 수 있었어요. 어느 정도 실력을 쌓고 중학교 언니와 경기를 하다가 공방 중에 넘어졌는데, 언니가 엉덩이를 밀어차서 이마가 모서리에 부딪혀 이마가 찢어졌죠. 마취를 하지 않고 16바늘 봉합 수술을 했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빠가 저에게 ‘너는 여자도 남자도 아닌 태권도 선수야! 다쳤다고 해서 울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그 후로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선수 정재은’으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죠.”

1991년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어린이 태권왕대회를 우승하고 당당한 포즈로 아버지와 함께

다부진 각오가 통했을까? 그 해 봄에 열린 전국어린이태권왕대회에서 금메달(핀급)을 거머쥐었다. 첫 번째 금메달이었다. 혹자들은 전국대회 금메달을 쉽게 획득했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반복되는 힘든 훈련을 견뎌야 했고, 체중을 감량하면서 배도 고팠다. 부상으로 인한 통증도 힘들게 했다.

중학교는 부모님의 권유로 태권도 선수부가 있는 곳으로 전학을 갔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1시간 20분을 가야 했지만 태권도를 계속 할 수 있어 행복했다. 새로운 선수부에 적응하고 기량을 쌓아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최우수선수상을 2년 연속 받았다. 함께 전학 온 친구와 후배가 있어 외롭지 않은 것도 좋은 성적의 비결이었다.

그런데 또 부상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통증이 등에서 허리로 내려갔는데, 어느 순간부터 골반으로 확산되어 걸어 다니는 것도 쉽지 않았다. 치료를 받으면서 대회를 준비했고, 진통제를 먹고 경기를 하기도 했다.

“당시 진통제와 약은 무섭지 않았어요. 허리를 다쳐 체중이 늘어 경기 당일까지 아침 6시에 출발해서 7시 50분 경기장에 도착하면 8시에 계체를 하고 바로 경기를 한 적도 있으니까요.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경기를 한 것이 아니죠. 다행히 이를 악물고 체중을 감량하고 경기장까지 뛰어온 노력이 금메달로 이어져 감내할 수 있었어요.”

# 부상과 체중감량 고통을 이겨내다

고등학교는 중학교 스승을 따라 갔다. 그를 지도한 감독이 태권도부를 창단해 자연스럽게 선택한 길이었다. 고등부 경기는 중등부와 달랐다. 모르는 선수들도 많았고, 기량도 만만하게 여길 수가 없었다. 달라지지 않은 것은 체중 감량. 숙소에서 경기장까지 뛰어가고, 사우나 한증막에 옷을 입고 들어가 땀을 뺐다. 그리고 다시 숙소에 들어와 춥지도 않은데 이불을 덮고 잤다. 체중 감량을 하기 위해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었다. 그럴 때마다 가족들이 큰 힘이 되어주었다.

“예선 경기를 이기고 다시 체중을 빼면서 숙소로 돌아오는데, 실루엣이 익숙한 한 사람이 서 있었어요. 누군가 하고 봤더니 작은 오빠가 동생을 격려하기 위해 경기가 열리고 있는 용인까지 온 거예요. 저에게 가족은 버팀목이었고 작은 오빠는 저의 우상이었죠. 가족들의 격려가 있었기에 제가 힘겨운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에게 고등학교 3년 시절은 행복했던 순간보다 고통스럽고 감내해야 하는 일들이 더 많았다. 1, 2학년 때 7kg을 감량하며 느낀 것은 지도자와 선배들의 성향에 따라 자신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너무 힘들어 태권도 선수를 그만 두는 동료들도 늘어나고, 나쁜 선배들과 갈등도 있었지만, 전국대회 금메달을 목표로 참고 견뎠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할까. 고교 2학년 때 최우수대회에서 1위를 한 후 그 여세를 몰아 1년 후 국가대표선수선발대회에서 2위를 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호재가 됐다. 그는 난생 처음 꿈에 그리던 태릉선수촌에 ‘대표 2진’으로 들어갔다. 1997년이었다.

최고의 선수들만 모여서 훈련을 하는 태릉선수촌의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32명의 선후배 선수들이 홍콩 세계선수권대회 출전권을 획득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대표 평가전은 힘겨웠다. 고교 3학년 어린 선수가 느끼는 중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침내 숨 막히는 경쟁을 뚫고 세계선수권대회에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할 수 있게 됐다. 스트레스성 위염과 허리 통증이 심했지만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수능 시험을 보자마자 홍콩으로 가서 경기를 하고 영광의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어요. 그런데 세계 챔피언이 됐다는 기쁨도 잠시, 시상식에서 태극기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어릴 적 꿈이었던 전국대회 금메달을 따고, 더 큰 세계대회에서 챔피언이 됐는데, 이제 무슨 꿈을 꾸면서 살아가야 하나…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그 때 한국체육대학교 이승국 교수가 ‘올림픽 태권도 금메달리스트’의 꿈에 도전하라고 권유했다. 그는 한국체육대학교에 진학했다. 그 곳에서 기량이 좋은 외국 선수들과 교류하고, 물리치료실에서 정기적인 치료를 받으면서 별 어려움 없이 선수 생활을 했다. 선수들의 식단 관리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맛있는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던 것도 활력소였다.

“한국체육대학교는 제가 운동에 열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어요. 가끔 운동이 힘들고 지칠 때면 대학교 운동장에 앉아서 선수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살펴보곤 했죠. 일종의 ‘이미지 트레이닝’인데, 열심히 훈련하는 선수들을 보면서 자극을 받았죠. 그리고 태권도에 관한 전문적 지식이 있는 교수님들과 코치님의 도움을 받아 여러 국제대회에서 입상을 하면서 시드니올림픽을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어요.”

2000시드니올림픽 여자 -54kg 시상식에서 정재은 선수(가운데)가 두 팔을 들어 올리며 기뻐하고 있다.
# 마침내 달성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2000 시드니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은 가시밭길이었다. 힘든 나날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한 것은 같은 학교 친한 친구인 장지원 선수와 경쟁해야 한다는 중압감이었다. 58kg이었던 체중이 갑자기 7kg이나 빠지면서 근육양이 줄고 근력이 약해져 경기력을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우여곡절 끝에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지만 고통은 여전했다. 정신적인 중압감을 이기지 못해 체중이 빠지면서 구토 증세와 눈의 피로가 쌓였다. 충분히 휴식을 한 후 식사를 해야 했고, 쉬는 시간에는 눈 충혈을 막기 위해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또 스트레스성 위염으로 위장약을 복용해야 했다. 하루에 몇 번씩 물리치료를 받는 일은 허다했다. 그 과정 속에서 그를 지도하는 교수들과 코치, 팀 닥터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과 분석을 하는지 깨닫기도 했다.

2000년 9월 28일, 마침내 그 날이 왔다. 예선부터 쉬운 경기가 없었다. 마인드 컨트롤을 하면서 경기를 풀어나갔다.

“준결승전에서 금메달 후보 터키 선수를 만났어요. 그 선수와 여러 번 경기를 했지만 참 어려운 선수였죠.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데, 관중석에서 큰 소리로 말하는 문원재 교수님과 함준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어요. 저는 그 소리를 들었다는 표시를 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어요. 항상 제가 경기를 할 때 두 분의 목소리와 눈빛은 항상 저를 지지해주고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죠. 인자한 아버지 같았던 이승국 총장님은 조언과 응원을 아끼지 않았어요. 세 분의 계셨기에 올림픽 시상대 맨 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2001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서 정재은 선수가 함준 코치와 소통하고 있다.
# 가족이야기 : “행복의 원천”

11년 전 결혼한 그는 경북 포항에서 3명의 자녀를 키우고 있다. 남편은 축구 선수였다.

“남편은 정말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소속팀의 경기가 끝난 후 영상을 20번 이상 돌려 보면서 좋았던 점과 보안해야 할 점을 찾아 선수들에게 일깨워주죠. 그런 남편의 지도력과 열정을 보면서 영감을 얻고 많은 것을 배운답니다.”

첫째 딸 하랑이는 태권도와 음악, 역사를 좋아한다. 최근에는 2품을 취득해 겨루기 대회에 나갔다. 둘째 딸 하나는 미술과 글쓰기를 잘하며 배려심이 좋다. 엄마의 마음을 잘 이해해 주고 언니에게 양보하며 동생과 친구처럼 지낸다. 그림에 소질이 있는 막내 하은이는 씩씩하고 밝다. 항상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그는 “내가 편하게 스포츠와 봉사 등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가족들이 이해해 주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정재은 이사의 행복한 가족
# 은퇴 후 사회 봉사활동

2004년 선수 생활을 은퇴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사회봉사 활동이다. ‘선수 시절 국민들에게 받은 사랑을 은퇴 후 다시 되돌려 주자’는 의미에서 만든 <함께 하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에서 스포츠 스타 출신들과 함께 활동하며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았다.

“15년 동안 봉사활동을 하면서 그들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장애인 친구들과 마라톤 행사를 했는데 전년도 행사에 왔던 장애인 친구들이 나를 알아보고 인사해서 고마웠지만 부끄럽기도 했어요. 그들은 한 번 스친 사람도 기억해주고 반가워하는데 정작 저는 그들을 기억하지 못해서 정말 부끄러웠어요. 어쩌면 제가 그들을 도와주는 것보다 그들에게 위안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죠.”

그는 한국체육대학교에서 박사학위(체육철학)를 취득하고, ‘배움은 끝이 없다’는 생각에 스포츠 윤리교육 전문강사 양성 과정(기본소양, 스포츠윤리, 교수학습법, 교육실습)을 수료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2017년부터 스포츠 윤리교육 전문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스포츠윤리를 통해 스포츠 선수들에게 윤리적인 측면을 강의하고 국가인권위원회 인권 강사도 하고 있다”면서 “이런 활동은 배운 것을 토대로 나를 찾아가는 방법이다. 내가 태권도인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멋진 삶인지 배움과 활동을 통해 느끼고 있다.”고 했다.

이런 활동을 인정받아 2018년 10월,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2018글로벌 자랑스러운 인물대상’ 시상식에서 스포츠 발전 공헌 대상을 받았다.

정재은 씨가 대학에서 운동 선수들을 대상으로 스포츠 윤리를 강연하고 있다.
# 태권도계 활동과 꿈

그는 현재 경북태권도협회 이사를 맡고 있다. 태권도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지 않지만 가끔 태권도 경기장에 가서 태권도 현안과 발전 방안 등을 생각하곤 한다.

“제가 선수생활과 지도자를 할 때와 지금은 큰 틀에서 많이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경기규칙은 시대 흐름에 따라 조금씩 바뀌었지만 태권도 기본은 바뀌지 않았으니까요. 태권도 기본기를 충실하게 습득한 후 응용을 하는 것이 중요해요. 후배 선수들을 응원하면서 제가 할 역할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후배들을 위해 발 벗고 도와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시나브로 40대가 됐지만, 그는 여전히 목표를 향해 도전하고 있다. 그 중의 한 가지가 품새를 정확하게 익히는 것이다. 이미 국가대표 태권도시범단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어 어려운 것이 아니다.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6단 심사를 봤어요. 심사를 준비하면서 느낀 것은 품새를 하면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죠. 품새를 통해 건강한 심신을 만들고 딸과 함께 품새대회에 참가하고 싶어요. 저는 태권도 선수들이 운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찾아가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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