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대승 교수가 4월 하순 가천대 캠퍼스를 산책하고 있다.

[알림] 이 기사는 대한태권도협회가 발행하는 태권도誌 2019년 5·6월호에 있는 내용으로, 서성원 기자가 취재·작성한 것입니다. 대한태권도협회 허가를 받아 전문을 싣습니다.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3연패한 선수는 여러 명 있다. 하지만 3연패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 있다. 2연패를 한 것에 만족하고, 미련 없이 선수 생활을 그만두려고 했지만 주위 사람들이 만류했다. 선수촌에서 합숙훈련을 하는 것보다 선수 생활은 은퇴하고 학업에 전념하려고 했던 그의 의지는 현실의 벽에 부딪혔고,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3연패 도전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2019년 4월 하순, 경기도 성남에 자리잡은 가천대학교에서 1987년·1989년·1991년 한국대표선수로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3회 연속 금메달을 획득한 양대승 교수(51)를 만나 화려한 선수 생활과 태권도 교수의 역할, 앞으로 꿈에 대해 들어보았다.

# 7살 때 태권도 시작, 고교까지 승승장구

양대승 교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코흘리개 유년 시절부터 태권도를 배웠다. 서울 도봉구(현 강북구)에서 태어난 그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며 태권도를 일찍 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성태권도장에서 김경찬 사범을 만나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친선 성격의 태권도 대회에 참가했다.

겨루기 선수생활을 본격적으로 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서울시장기태권도대회에 나가면서 엘리트 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중학교는 자연히 태권도부가 있는 학교로 진학했다. 그 곳이 바로 명문 동성중이었다. 당시 집 근처의 중학교에는 태권도부가 없어 ‘전략적 선택’이었다. 그 곳에서 친구처럼 지냈던 박봉권 선배를 만났다. 훗날 박봉권은 태권도 선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단짝이자 라이벌이 된다.

“마을에서 함께 자란 봉권이 형이 저보다 한 살 많았어요. 그래도 초등학교 다닐 때는 친구처럼 지냈는데, 중학생이 되어 같은 학교에서 만나니까 친구처럼 대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 때부터 선배 대우를 한 거죠.”

동성중에서 선수 생활은 평탄했다. 중학년 1학년 때 전국신인선수권대회에 출전해 밴텀급 1위를 했고, 중학교 2·3학년 때는 서울시 대표선수로 전국소년체육대회에 나가는 등 차세대 기대주로 각광을 받았다.

고난도 있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家勢)가 급격히 기울었다. 동성중 선수들은 같은 학교법인 계열의 동성고로 진학했지만, 그는 다른 학교를 선택해야 했다.

“아버지는 집안이 어려웠지만 자존심은 세셨어요. 서울체고에서 숙식을 제공해 주는 조건으로 저를 받아 주기로 했는데, 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어요. 하지만 저를 가르쳤던 박종식 선생님이 아버지께 잘 말씀해 주시고, 제 형편을 도와줘서 서울체고에 갈 수 있었어요. 참 고마운 분이시죠.”

이런 과정을 거쳐 서울체고에 진학한 그는 범상찮은 선배들과 한솥밥을 먹게 된다. 2학년엔 강철우·윤순철·이영혁, 3학년엔 오영주·이주열·박하영 등의 선배들이 버티고 있었다. 당시 서울체고는 잠실에 있었다. 국기원에서 태권도 대회가 열리면 선수들이 무리를 지어 학교에서 테헤란로를 거쳐 국기원으로 로드웍(roadwork) 하곤 했다. 보통 2개월에 한 번씩 했는데, 힘들었지만 지금은 추억거리가 됐다.

고교에 진학해서도 양대승 교수는 발군의 기량을 뽐냈다. 라이트급으로 체급을 굳히면서 전국체육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전국 규모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주위에서는 ‘차세대 국가대표 선수’로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86서울 아시안게임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에게도 아시안게임에 태극마크를 달고 참가할 수 있는 마지막 관문이 주어졌다. 리그전으로 펼쳐진 최종선발대회에서 그는 동네 형 박봉권에게 밀려 2위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대표 2진 자격으로 생애 처음으로 세계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 해 7월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열린 제1회 월드컵태권도대회에서 이집트 선수를 결승에서 꺾고 정상에 올랐다. 이 대회를 통해 그는 ‘라이트급 터줏대감’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 한체대 진학하자마자 십자입대 파열

1987년 서울체고 옆에 자리잡은 한국체육대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대회를 앞두고 실시된 강화훈련 도중 크게 다쳤다. 함께 훈련하던 선수와 부딪혀 무릎 안에 있는 후방십자인대가 파열된 것. 전방십자인대에 비해 후방십자인대는 두께가 두꺼워 일반적으로 무릎 관절을 수 개월 동안 고정한 후 무릎의 원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재활 트레이닝을 해야 한다. 그래야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근력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발목 관절과 복부 근육도 같이 트레이닝을 해야 몸의 밸런스와 충격 흡수기능, 민첩성과 순발력, 다른 근육과의 협응력이 원활해진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재활 과정을 밟지 않았다. 눈 앞에 다가온 한국대표선수선발대회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엔 재활 개념이 없었어요. 다치면 약을 바르거나 반창고를 붙이는 게 허다했으니까요. 대표선발전을 앞두고 치료를 받은 후 대퇴부터부 발목까지 테이핑을 했어요. 경기 출전을 하려고 하니까 이물질을 붙인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살 정도였죠. 아마 테이핑을 하고 경기를 한 최초의 선수일 겁니다.”

그 해 4월 국기원에서 열린 제8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파견 한국대표선수 최종선발대회에서 4명의 선배들과 리그전으로 맞붙어 대표 1진이 됐다. 당시 주목을 끌었던 경기는 박봉권과의 재대결이었다. 경기 경과는 예상과 달랐다.

당시 주위에서는 이렇게 평했다.
“양대승과 박봉권 선수의 경기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태권도를 수련해온 한국체육대학교 선·후배 간의 경기였다. 서로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어 치열한 공방전을 했으나 신장과 힘이 우세한 양대승 선수가 판정승을 했다.”

하지만 32년이 지난 후 양대승 교수는 “당시 나는 대학교에 갓 입학한 1학년이었다. 내 기량이 뛰어나서 대표선수가 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무릎을 다쳐 기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나를 배려해 선배들이 양보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나와 대표 1진을 다툰 봉권이 형이 봐준 것 같다”고 회고했다.

# 전성기 구가하며 세계선수권 3연패 달성

1987년 스페인 바로셀로나에서 열린 제8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생애 처음으로 라이트급 챔피언이 된 그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1989년 5월, 국기원에서 열린 한국대표선수 최종선발대회는 그의 진가가 발휘된 독무대였다. “당분간 라이트급에서 양대승을 이길 선수는 없을 것이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그는 리그전으로 맞붙은 김관석·박세진·김찬구·이창건을 모두 이겨 4승으로 제9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출전 티켓을 따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제9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라이트급 정상에 올랐다. 대회 2연패는 비교적 쉽게 이뤄졌다.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2연패를 달성한 그는 선수 생활에 미련이 없었다. 겉멋과 자만심이 생겼는지는 몰라도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대학원에 진학해 그동안 하지 못한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세계 라이트급 챔피언을 2번이나 하고 4학년이 되니까 운동하기가 싫었어요. 대표선수로 선발되면 태릉선수촌에 들어가 몇 달 동안 합숙 강화훈련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너무 싫었고요. 그래서 거의 운동을 하지 않았어요. 태권도 선수로 최고점을 찍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물론 후배 선수들에겐 질 수 없다는 승부 기질은 여전했죠.”

1991년 한국체육대학교를 졸업한 양대승 교수는 대학원에 진학해 학업에 충실했다. 하지만 선수 은퇴를 만류하는 손길이 그의 앞 길을 막았다. 전국체육대회 일반부로 1년에 한 번만 출전해 달라는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전북에 기반을 둔 조선맥주(크라운)와 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또 다시 한국대표선수 최종선발대회에 출전하게 된 것이다.

“그 때는 운동하기 싫어서 술도 많이 먹고 공부나 할 작심이었어요. 대한태권도협회에 가서 더 이상 국가대표 선수를 정말 하기 싫어서 각서까지 썼어요. 다 밝힐 순 없지만, 후배 하태경과 주고 받은 이야기도 있고요. 그런데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대표선발전에 나가게 됐고, 또 다시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출전권을 따낸 거예요. 알 수 없는 태권도 선수 생활이었지요.”

‘라이트급 터줏대감’ 양대승 교수는 한 체급을 올린 대학 후배 하태경을 제치고 1위를 했다. 그리고 그 해 10월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제10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노련한 경기 운영과 한 수 위의 기량으로 그리스와 오스트레일리아, 모로코, 필리핀 선수들을 차례로 제치고 영예의 대회 3연패를 달성했다. <동아일보>는 1991년 11월 4일자에서 ‘양대승 라이트급 금메달, 한국 남녀 종합우승’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 지도자·교육자의 길을 걷다

1992년 전국체육대회를 끝으로 화려했던 14년의 선수 생활을 은퇴한 그는 모교 한국체육대학교 코치를 하면서 학업에 전념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2000년 대전광역시 대덕대학 사회체육과 교수로 임명된 후 후진 양성에 힘썼다.

2003년 자연과학 분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연구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아 △태권도 선수의 공격유형별 선제득점에 다른 경기결과 분석(한국스포츠리서치, 2006) △태권도 차등점수제 도입에 따른 선제 득점의 체급별 회전별 경기분석(한국사회체육학회지, 2007) △여자 태권도 품새선수들의 성취목표에 따른 스트레스 요인 및 대처방안(한국여성체육학회지, 2010) △노인 여성의 12주간 유산소성 복합운동이 신체조성 및 혈관탄성에 미치는 영향(한국체육과학회지, 2012) △태권도 전공학생의 교수-학생 상호작용과 학업성취도, 진로결정태도 및 전공만족도의 관계(한국체육과학회지, 2017) 등 2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양 교수는 학교를 떠나 대외 활동도 활발하게 했다. 2007년 9월 국기원에서 시행한 3급 사범지도자연수에서 ‘겨루기론’을 강의하면서 국내 태권도 대회의 경향과 전자호구 도입에 따른 기술 변화 등을 설명했다. 그리고 기본 발차기, 스텝, 표적 발차기, 전술 등을 지도했다. 그는 “연수생 대부분이 선수 경험이 없어 겨루기에 대한 부담과 두려움이 있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 겨루기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하고, 겨루기 기본 원리를 응용한다면 태권도장에서 기본 발기술로도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2006년 가천대학교 태권도학과 교수로 임용된 그는 13년째 태권도 전공생들을 가르치고 인성 면담과 진로 상담을 도맡아 하고 있다. 주로 트레이닝방법론, 운동생리학, 코치론, 겨루기 실기 등을 강의하면서, 학생들이 대회에 참가해서 입상하는 것보다는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창의적인 인재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태권도 전공은 체육학부에 속해 있지만, 독립된 학과 개념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1학년 정원이 30명인데, 학교 특성화 사업에 태권도가 선정되어 융·복합 교육 활성화를 하고 지역사회 건강과 복지에 기여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현재 가천대학교 체육학부 태권도 전공 학과장을 맡고 있는 그는 태권도가 지역사회에서 공헌할 수 있는 내용을 탐색하고 있다. 특성화 사업에 선정된 것을 토대로 학교 내에서 태권도의 입지를 튼튼하게 하고, 성남시와 연계해 고령층을 대상으로 태권도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건과 건강에 이바지할 수 있는 물밑작업을 하고 있다. 양 교수는 “태권도가 지역 주민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서 지역 사회에 공헌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그 출발선에 서 있다”고 말한다.

양대승 교수가 앞으로 포부를 말하고 있다.
# 태권도 현안 지적하며 대안 제시

2019년 3월 7일, 국기원에서 ‘국기원 정관 개정을 위한 공청회’가 열렸다. 이번 공청회는 지난해12월 국기원 정기이사회에서 의결된 정관 개정(안)이 문화체육관광부 승인 과정에서 보완 의견과 함께 반려되면서 열렸다.

이날 양대승 교수는 토론자로 나와 날카로운 지적과 대안을 제시해 주목을 끌었다. 그는 “개정(안)에는 보완해야 할 내용도 있고, 버려야 할 기득권과 권위의식이 있다”고 포문을 열면서 “원장 후보는 복수지만 결국 원장은 이사들이 선출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원장후보선출위원회에서복수로 추천하는 것을 단수로 하고, 그 단수의 후보자에 대해 이사회에서 추인하는 것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이어서 “원로회의 권위를 높게 하는 것은 좋지만 이사추천위원 추천권을 부여한다면 객관성 강화와 상충할 수 있는 우려가 높다”면서 “태권도와 관련한 다수의 사단법인이 있는데 9단 연맹에만 이사추천위원회 위원을 부여하는 것은 다른 태권도 사단법인과 형평성 논란이 있어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앞으로 꿈은 “봉사와 나눔 활동”

대학교 전임 교원의 정년은 만 65세까지다. 하지만 그는 정년퇴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대학원생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양 교수는 평소 ‘앞으로 10년만 교수 생활을 하고, 정년까지 남은 3∼4년 전에 명예퇴직을 해서 어떻게 봉사 활동을 할 것인가’를 구상하고 있다.

“TV에서 연예인들이 아프리카 등 외국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나도 더 늙기 전에 봉사 활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연예인들이 봉사하는 모습이 얼마만큼 진정성이 있는지 모르지만, 참 좋아보였거든요. 그래서 교수 정년을 끝까지 채우지 않고 봉사와 나눔 활동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양 교수의 아내는 정신지체 아동을 가르치는 교사여서 그의 의지와 뜻을 잘 헤아리고 있다. 앞으로 10년이 지난 후 양 교수와 그의 아내가 어디에서 봉사와 나눔 활동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서성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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