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태권도진흥재단을 방문한 남태희 원로가 태권도를 쓴 후 서명을 하고 있다.

‘태권도(跆拳道)’는 최홍희와 남태희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최홍희가 주연이라면 남태희는 조연이라고 할 수 있다.

태권도 명칭을 제정하는 과정과 공신력을 획득하기 위해 대통령 이승만의 휘호를 받아내는 과정은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최홍희의 주장대로 1955년 4월 11일 명칭제정위원회에서 태권도를 제정했다고 하는 통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태권도 명칭 제정과 휘호를 둘러싼 내막을 살펴보자.

최홍희는 1953년 9월, 보병 제29사단을 창설하라는 명령을 받고 제주도 모슬포로 내려갔다. 당시 육군참모 총장 백선엽의 견제를 받고 있던 그는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로 여기고 전력을 다했다. 29사단장은 최홍희의 태권도 인생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는 29사단을 상징하는 사단기를 만드는 데 힘썼다. ‘29’라는 숫자에서 ‘2’는 분단된 한반도를 상징화했고, ‘9’자는 움켜쥔 주먹을 나타냈다. 한반도 지도에다 주먹을 그린 사단의 마크는 ‘익크 부대’1)로 통용됐다. 이 시기 최홍희는 대위 남태희를 부관으로 두고 사단 장병들에게 태권도를 교육해 오늘날 오도관의 초석을 이뤘다2)는 증언도 있다. 남태희의 증언.

최홍희 장군과는 29사단에서 처음 만났다. 내가 육군종합학교 다닐 때 최 장군이 부총장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인연이 없었다. 29사단에 근무하면서 화랑무도관을 만들어 운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29사단장이던 최 장군이 화랑무도관에 방문해 나보고 형(型)을 해보라고 시켰고, 나는 청도관 이원국 관장님께 배훈 형을 시연보였다. 최 장군은 부사단장이었던 하갑천 장군과 함께 아주 흡족해 했고, 그게 나와 최 장군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3)

최홍희는 남태희를 앞세워 휘하 장병들에게 당수를 가르쳤다. 그는 “내 휘하 장교들과 당수 교관들에게 매우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이 당수를 훈련할 때 군대의 계급과 상관없이 전부 교관들에게 인사를 해야만 했다. 군사 교련과 당수 훈련의 결합은 우리 사단을 한국군의 다른 사단 중에서 유별나게 만들었다”4)고 말했다 최홍희가 이끄는 29사단은 1954년 6월 제주도를 떠나 육군본부직할의 제1군단에 배속됐다. 그 해 9월 제1군단 창설 4주년 기념일이 설악산 오호리 평야에서 열렸는데, 이 날은 최홍희의 태권도 인생에서 상징적인 일이 벌어졌다. 창설 기념식에서 열린 당수대회에서 최홍희가 이끄는 사단이 시범을 보인 것이다. 이 광경을 이승만 대통령은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최홍희의 증언.

대통령은 앉지도 않고 줄곧 서서 구경하더니 “저것이 우리나라에 옛날부터 있던 택껸이야?” 한 다음 “이것으로 깨뜨렸지?‘ 하며 자기 오른 주먹의 사용부분을 손가락으로 정확하게 가리켰다. 뿐만 아니라 그는 ”택껸이 좋아. 이것을 전군에 가르쳐야 해. 그 서양 사람들은 윗동이만 쓰는데, 발로 차면 빙그르르 주저앉을 게 아닌가“라고 조크까지 했다.5)

이승만 대통령의 이 같은 말은 최홍희를 벅차게 만들었다. 1990년대 말부터 캐나다에서 수년 간 최홍희를 보좌해온 정순천6)은 2010년 한국을 방문한 남태희를 만나 당수도 연무시범의 뒷이야기를 들었다. 정순천은 “그(남태희)는 당시 시대적 상황과 인물들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시연한 그 때를 마치 파노라마 사진을 펼쳐 놓은 것처럼 상세하게 들려주었다”며 남태희의 증언을 이렇게 기록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당수도 시범을 하기 위해 흰 도복을 입고 장병들 앞에서 나설 때  흰 도복을 처음 본 다른 장병들은 낄낄대고 비웃었다고 했다. 당시 도복의 띠는 흰띠, 자띠(적), 검은띠 밖에 없었지만 구분이 단순해서 청띠를 만들어서 메고 시연에 나섰다고 한다. 그리고 15분 당수도 시연을 하는 동안 이승만 대통령 단상에는 이형근 대장을 비롯 당시 최홍희 장군이 자리를 하고 있었으며 예정된 시연이 끝나고 이승만 대통령이 조금 더 해보라는 명령으로 시연을 위해 연습한 것 외에 즉석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게 마땅하지 않아서 남태희가 한차교를 불러내어 겨루기 시연을 15분 정도했다고 한다. 당시 남태희는 기왓장 12장을 정권으로 격파하는 시연을 했는데, 멀리 있는 단상에서 관람한 이대통령이 손으로 가리키며 저것은 무엇으로  격파했는지 묻자, 옆에 있던 최홍희 장군이 정권을 가르치며 이 대통령에게 당수(수도)가 아닌 정권으로 격파했다고 설명했다.7)

대통령이 무술에 관심을 보이자 무술을 도외시하던 군 수뇌부들을 설득시킬 명분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태권도(跆拳道)’를 작명하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최홍희가 이끄는 29사단은 설악산 서쪽의 용대리로 옮겨 강원도 동해안을 포함한 일대의 작전 책임을 맡았다. 이 때 그는 체육관을 짓게 하고 그 곳을 오도관(吾道館)이라 이름붙였다. 태권도는 남태희가 맡았다. 최홍희는 “오도관의 오도(吾道)는 ‘공자가 나는 오직 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야(吾道一以貫之)’라고 한 말이 나의 성격과 비슷하거니와 내가 연구하는 태권도를 세계로 뻗치겠다는 포부를 뜻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오도관에는 초대 사범이었던 남태희를 비롯해 백준기, 고재천, 김석규, 우종림, 한차교 등이 활동했다. 이들은 청도관 출신으로 훗날 최홍희가 민간 도장에 영향력을 행사할 때 버팀목이 되어줬다.  1955년은 최홍희에게 잊을 수 없는 해이다. ‘태권도’가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1946년 3월부터 갖은 난관을 무릅쓰고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만 9년이 되는 1955년 봄에 이르러 현대적 무도의 기초를 완성하게 되었다”8)며 기뻐했다.

최홍희는 당수도를 대신할만한 명칭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부관 남태희와 함께 옥편을 뒤적거리며 연구를 거듭한 끝에 태껸의 ‘태(跆)’자가 뛰고 차고 밟는다는 뜻을 담고 있어 당수, 공수도보다는 주먹권(拳)자를 사용, ‘태권도(跆拳道)’라는 명칭을 만들었다. 정순천은 “태권도 작명가는 최홍희 총재와 남태희 원로 두 사람이다. 굳이 ‘태’자의 발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면, 이승만 대통령의 태권도 작명의 공로(?) 역시 재조명되어야 한다. ‘태권’의 작명 과정에서 서로의 주장은 다르지만 두 사람이 조합해서 만든 것은 태권도사에 이제라도 올바르게 기록되어야 한다”9)고 주장한다. 여기서 태권도 명칭 창안에 대한 남태희의 증언을 들어보자.

▲ 최홍희가 서회 저명한 인사들을 불러 모아 1955년 4월 11일 태권도 명칭을 제정한 회의라고 주장하는 사진

이승만 대통령에게 시범을 보인 날 최홍희 장군이 나와 같이 사단장실로 가자고 했다. 그래서 이 대통령이 이야기한 태껸을 옥편에서 찾아봤지만 없었다. 계속 옥편을 찾아보다가 ‘밟은 태(跆)’를 발견했다. 일단 태를 골라 놓고 그 다음 ‘껸’를 찾았지만 옥편에 없었다. ‘수(手)’자도 고려했지만 당수도, 공수도 등 색채가 진해서 손보다는 강한 ‘주먹 권(拳)’을 선택했다. 태껸과 태권은 발음도 비슷했다. 최 장군과 나는 태권이라는 명칭이 좋겠다고 결심했고, 명칭제정위원회를 통해 공론화하기 시작했다.10)

이처럼 각고의 노력 끝에 태권도를 작명했지만 최홍희의 고민은 계속됐다. 태권도가 당수도와 공수도를 제치고 보편타당성을 확보하려면 공신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견제하고 있는 군 내부의 모략과 당수도와 공수도, 권법을 사용하고 있는 민간도장의 반발이 걱정되었다. 최홍희는 마음 속에 태권도를 숨겨 놓고 기회를 기다렸다. 궁리 끝에 그는 ‘명칭제정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최홍희는 당시 자신을 지원하던 장군 이형근의 힘을 빌려 국회 부의장 조경구를 비롯한 사회 저명인사와 언론인들11)이 참석한 가운데 고급 음식점에서 회의를 열었다. 그는 이날을 1955년 4월 11일이라고 증언한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최홍희가 말문을 열었다. “지금 국내 도처에서 같은 무도를 놓고 당수, 공수, 권법 등 제각기 마음대로 명칭으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새로운 이름을 제정하기 위해 모였다”며 이날 모임의 취지를 설명한 최홍희는 각자 명칭을 기재하여 무기명으로 투표한 다음 토의에 붙여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명칭 제정은 최홍희의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개표 수가 거의 5분의 4에 이를 때까지 당수가 아니면 공수도 일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머리 속에는 일본 가라테만 박혀 있을 테니까. 그러다 ‘태권’ 두 글자가 나오니 모두들 처음 듣는 이름이기도 하려니와 좀처럼 드문 ‘태’자라 ‘이것을 누가 냈는지 설명하시오’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먼저 글자 풀이부터 해야겠기에 ‘태’자는 발로 뛴다, 찬다 또는 밟는다를 의미하며 ‘권’자는 주먹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주먹은 단순히 손을 폈다 쥐었다 하는 주먹이 아니라 여러 형태의 주먹으로 찌르고, 뚫고 혹은 때리는 무도행위를 뜻하는 주먹입니다’하며 시범했다.12)

발음이 비슷한 ‘태권’과 ‘택껸’의 역사성도 거론하며 참석자들을 설득하자 최홍희가 갈구한 태권도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최홍희는 이승만을 경호하는 경무대 실력자들을 고급 술집에서 융숭하게 접대해 ‘택껸’을 고집하는 이승만으로부터 한자로 쓴 ‘跆拳道 雩南’ 휘호를 받아냈다며, 이 휘호가 발표됨으로써 태권도는 누구의 모략도 받을 수 없이 공식 명칭으로 사용되었다13)고 주장한다.

이런 연유로 최홍희를 추앙하는 사람들은 4월 11일을 ‘태권도의 날’로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태권도 역사학자 이경명은 이 같은 논리에 의문을 제기한다. 태권도 명칭제정과 이승만으로부터 태권도 휘호를 받는 과정이 의혹투성이라는 것이다. 이경명은 태권도 명칭 제정은 1955년 4월 11일이 아닌 1955년 12월 19일 대한당수도 청도관고문회회의에서 최홍희가 제안한 ‘태권’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라고 기록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최홍희가 태권도사를 왜곡, 날조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홍희가 저술한 『태권도백과사전 1』(초판 1983, 수정재판 1987)을 보면 서울 종로 국일관에서 가진 기념사진이 실려 있는데, 사진 아래에 한자로 ‘大韓唐手道 4288. 12. 19. 靑濤館 第一會 顧問會’라고 되어 있다. 최홍희는 이 사진을 가리켜 태권도 명칭제정위원회 회의 사진이라고 한다는 게 이경명의 주장이다.

이경명은 2001년부터 이 문제를 제기해 왔다. 그는 2001년 11월 태권도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최초의 태권도 명칭은 1955년 12월 19일 청도관 고문회 회의에서 나왔다”고 밝혔다. 그는 이 글에서 “태권도 명명은 엄밀히 말하자면 대한당수도 청도관고문회 모임에서 결의된 명칭 변경이다. 최홍희가 말하는 ‘명칭제정위원회’에서 제정됐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분명한 왜곡이다”14) 고 설파한다. 이경명의 주장.

태권도 유래 및 개명의 의의 등 그(최홍희)의 저서에 따르면, ‘대한당수도 청도관 제1회 고문회’ 모임을 ‘명칭제정위원회’로 왜곡하고 있다. 모임 후 한 장의 기념사진과 당시 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나란히 싣고 있는데, 사진에 새겨진 글씨는 단기 4288(서기 1955년 12월 19일)이다. 그런데 정작 주요 단서가 될 신문사명과 보도된 기사의 연월일을 삭제하였다.1955년 4월 11일과 ‘태권도의 날’ 등의 왜곡은 그의 저서 ‘태권도교서(1973)’에서 처음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무도의 성격에 알맞고 역사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이름을 짓고자 고심하다가 마침내 1955년 4월 11일 개최된 명칭제정위원회에서 본인이 제출한 태권도가 만장일치로 가결됨으로써 여태까지 각각으로 불리어 오던 이름을 태권도를 단일화하게 되었다. 4월 11일을 태권도의 날로 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라는 대목이다. 앞서 ‘태권도 우남’ 휘호 관련해 소상히 밝혔듯이 이와 연계되는 모든 사실을 은폐하고자 ‘대한당수도 청도관 제1회 고문회’ 모임 자체를 그는 ‘명칭제정위원회’로 둔갑하고 있으며, 모임은 종로 2가 국일관 요정에서 가졌었는데 그 날자는 1955년 12월 19일이다. 그는 1955년 4월 11일을 명칭제정일이라고 했다가 어느 책에서는 틀(품새)을 완성한 날이라고 하기도 하는가 하면, 더구나 이승만 국부로부터 태권도 휘호가 내려진 날 등 일관성이 없는 주장을 펴고 있다.15)

이경명은 1955년 4월 11일에 태권도 명칭을 제정했다는 최홍희의 주장은 “조작되었고, 4월 11일은 가공된 날짜라고 단언할 수 있다”16)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최홍희가 저술한 『태권도교서』(1973)에 수록되어 있는 명칭제정위원회 사진도 1955년 12월 19일 청도관 고문회 모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명칭제정위원회 사진 옆에 편집되어 붙어 있는 정체불명의 신문기사17)는 신문제호와 날짜, 기자 이름이 빠져 있어 사료가치가 결여되어 있다는 입장이다. 이 기사를 인용한 몇 몇 논문은 동아일보에 이 기사가 게재되었다고 하지만 이경명이 동아일보를 직접 방문해 1955년 4월에 발간된 동아일보 기사를 마크이로필름으로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발견하지 못했다.18)

이 같은 반론에 최홍희를 오랫동안 보좌해온 정순천은 태권도 명칭 기원에 대해 이렇게 주장했다.

태권도 명칭 기원은 태권도 역사에 첫 단추를 꿰는 중요한 것이다. 명칭의 기원을 두고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태권도란 무도명의 시작을 두고 최홍희 총재가 1955년 4월 11일 주도한 명칭제정위원회가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요약되지만 (…) 이경명 반론 이후 최홍희 총재를 찾아가서 명칭제정위원회의 배경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결과 동아일보에 명칭제정위원회의 사진이 보도되었다는 것은 최 총재가 언급한 것이 아님을 들을 수 있었다 (…) 최 총재의 주장은 명칭제정위원회 기사가 언제 어떤 신문으로 나갔는지 알 수 없으며 다만 일간지나 유명신문이 아닌 전문지에 나간 것으로 추정했으며 기사가 나간 날짜 또한 4월 11일 이후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았다 (…) 명칭제정위원회의 신문기사 내용 확인 작업은 사진과 활자상태를 가지고 당시 무슨 신문사인지 찾는 방법과 당시 참가한 생존인물들의 증언으로 확인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으로 사료된다. 19)

이경명은 최홍희가 이승만으로부터 한자로 ‘跆拳道 雩南’ 휘호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조작됐다는 것이다. 이경명의 주장.

두 차례 대통령에게 ‘태권도’ 휘호를 요청한 날은 1956년 1월 중이었다. 최홍희는 언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한자로 쓴 ‘태권도 우남’이라는 휘호가 내려졌는지 자신의 그 많은 어느 저서에서도 밝히지 않고, 아니 정확히 말해 밝히지 못하고 있다. 그가 주창하는 ‘跆拳道 雩南’(태권도 우남) 휘호! 그는 단 한 번 ‘태권도교본(1959)’에 ‘우남’ 형과 함께 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1960년 발간된 ‘태권도교본’ 재판에서 영원히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 책마저 정보기관에서 회수되는 일련의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나는, 그의 전 3권의 회고록 등에서도 휘호를 게재하지 못한 것은 진정성을 의심받게 한다. 또 다른 하나는, ‘휘호’에 낙관이 없다는 것이 더욱 신빙성을 희박하게 하는 것이다. 그 중대한 역사적 기록을 남기는 행위에 대통령이 휘호에 낙관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위작이라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다른 작품에는 단지 ‘우남’이라는 호만 적고 있는 경우도 있되 반드시 낙관을 빠트리지 않고 있다. 20)

이 같은 이경명의 주장에 정순천은 허구라고 반박했다. 2006년 서울에서 박철희를 만났는데 이승만의 태권도 친필 휘호가 존재한다고 증언했다는 것이다.

박철희 관장은 경무대 태권도 교관으로서(육사초대 태권도교관 역임) 당시를 상세히 증언했으며, 이승만 대통령 친필 복사본을 소장하고 있었다. 박청희의 증언은 이승만 대통령이 태권도 (휘호)를 친필로 하사했으며 최홍희 총재가 태권도 친필을 분실한 부분을 인정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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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태권도진흥재단을 방문한 남태희 원로가 최홍희 씨와 함께 작명한 태권도 명칭을 한자로 쓰고 있다.

이와 관련된 남태희의 증언도 보자.

(태권도 휘호를) 직접 봤다. 명칭제정위원회에서 결정을 했지만 우리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느냐? 대통령께 상신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조경구 국회부의장과 이형근 대장이 경무대를 방문했고 대통령의 휘호를 받았다. 그리고 이형근 대장이 대전에 있는 3강구로 내려와서 나한테 (태권도 휘호를) 보여줬다. ‘태권도(跆拳道)’라고 세로로 쓰여 있었고, 옆에 이 대통령의 호인 ‘우남’이 씌여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보관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고, 최 장군이 보관하게 됐다. 그 뒤로는 본 적이 없다.22)

정순천은 박철희 등의 증언을 토대로 이승만이 쓴 태권도 휘호는 1955년 4월 11일 명칭제정위원회 이후부터 1959년 3월 국군태권도시범단이 활동하던 기간 중에 나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순천은 태권도 명칭 제정 시기와 이승만의 태권도 휘호를 놓고 일각에서 날조라고 주장하는 것은 최홍희와 자신 간의 관계를 개인적인 관계로 치부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지적한다. 정순천은 “최홍희 총재는 태권도 역사 자료들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소장하고 있었다. 때론 나의 까다로운 자료 제시와 증언 요구에도 상세하게 말해주었다”며 “한국의 제도권 학계에서는 제도권의 눈치와 아부의 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최홍희 총재의 친북 성향을 이용, ITF 최홍희 총재의 자료들을 사장시키고 있다”23)고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정순천의 주장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이경명은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태권도 명칭 제정과 이승만으로부터 태권도 휘호를 받는 과정이 날조되고 조작됐다는 것이다. 이경명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른 자료를 제시했다.

당시 명칭 제정위원회에 참석했고 대통령으로부터 명칭 승인을 받기 위해 경무대에 갔던 3인 중 한 명이었던 손덕성은, 그날 김창룡 특무대장의 암살로 면담이 취소되었다고 증언했다. 최홍희는 대통령 재가 관련 김창룡 암살사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그때 그런 일이 있긴 있었는데…’하고 여운을 남기면서, 명칭 제정 문제는 자신의 자서전에 적힌 그대로라고 일축했다.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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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이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한자 태권도 휘호

이경명은 이 같은 사실을 상기시키며 이승만이 태권도 휘호를 써줬다는 최홍희의 주장은 날조됐다고 강조한다. 특히 이승만의 친필 이름과 휘호를 쓴 연도, 낙관 등이 없어 이승만이 쓴 태권도 휘호라고 하기엔 신빙성과 보편타당성이 결여되어 있다. ‘태권도’ 글씨 왼쪽에 있는 이승만의 호 ‘우남’도 이승만의 친필인지 아니면 최홍희가 이승만의 필체를 흉내 내서 쓴 것인지에 대한 의혹도 여전하다. 이경명은 이를 두고 이승만의 휘호가 사실이라면 ‘국기 태권도 1971년 3월 20일 대통령 박정희(낙관)’ 휘호와 너무 대조적이라며 의문을 접지 않고 있다.

이승만 태권도 휘호를 둘러싼 의문점은 또 있다. 만약 최홍희가 이승만이 쓴 태권도 휘호를 받았다면, 1959년 9월에 협회 명칭을 정할 때 이승만 휘호를 왜 회의 참석자들에게 제시하지 않았는지 의아스럽다. 당시 청도관과 오도관의 지원을 등에 업은 최홍희가 협회를 창립할 때 협회 통합 명칭을 놓고 논쟁이 심했다. 최홍희는 훗날 자신이 ‘태권도’가 협회 명칭으로 된 것은 관 대표들이 육군 소장이라는 자신의 권위에 눌려 순순히 응했다고 술회했다. 이승만의 휘호를 민간 도장 관장들에게 제시했다면 이런 논쟁을 거치지 않고 단박에 태권도협회로 결정되었을 것이다.

논란은 또 있다. 최홍희가 태권도 명칭을 제정하고 이승만의 재가를 받는 과정에서 태권도 휘호를 받아냈다고 주장하지만 이와 대치되는 증빙공문이 발견됐다. 1959년 9월 14일자로 ‘공수도 창무관 전국도장’ 명의로 일선 도장에 내려 보낸 공문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 있다. 이 공문을 보면 이승만이 ‘태권도’ 명칭에 적극 개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산일보 보도25)에 따르면, 이 자료는 1960년대 창무관 영도지부 관장을 지낸 이성우가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도장 인수과정에서 건네진 공문철에 포함되어 있다. 이 공문은 단기 4292년(서기 1959년) 9월 14일자로 ‘대한체육회 가입 결정에 관한 건’을 다루면서 무술단체들이 대한체육회에 가입하기 위해 대한태권도협회를 만들면서 ‘태권’이라는 이름을 정하기 위해 국무회의 자리에서 이승만에게 ‘태권’이 맞는지 ‘택견’이 맞는지 명칭을 확인한 끝에 ‘태권’이라는 답을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승만이 ‘태권’ 명칭을 최종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료가 왜 1961년 9월 대한태수도협회를 창립할 당시에 증빙 자료로 제시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이 바뀌었지만 대통령이 결정한 ‘태권도’라는 명칭이 거론조차 되지 않고 태권도의 ‘태’와 공수(당수)도의 ‘수’를 합성해 협회 명칭을 ‘태수도’(跆手道)로 결정했다는 것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태권도 명칭 제정과 이승만 휘호를 둘러싼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논란은 객관적인 관점에서 냉철하게 고찰되어야 한다.

[각주]

1)최홍희는 29사단을 ‘익크부대’로 한 것에 대해 “신익희 선생을 존경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신익희의 ‘익희’ 두 자를 연상한 것이며, 주먹은 9자를 의미하는 동시에 내 주먹으로 38선을 때려 부수겠다는 데 그 진의가 있었다”고 밝혔다. 최홍희(2005). 태권도와 나. 도서출판 길모금.153쪽.
2)백준기(2006). 태권도신문. 2006년 10월 16일. 엄운규는 “최홍희가 29사단장으로 있으면서 태권도를 장병들에게 보급할 때, 군에 입대한 청도관 출신의 유단자들을 적극 활용했다. 교관으로 차출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청도관과 가깝게 지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태권라인. 2011년 6월 15일.
3)태권도. 대한태권도협회. 2010년 6월호(165호). 106쪽.
4)태권도타임즈. 2000년 1월호.
5)최홍희(2005). 태권도와 나. 도서출판 길모금. 155쪽.
6)정순천은 부산 출신으로 2001년 인터넷 다음카페에 ‘정태권도’를 개설해 본격적으로 국제태권도연맹과 최홍희의 행적을 게재했다.
7) 정순천(2010). 남태희 원로의 한국 방문과 태권도 작명의 비밀. 네이버 지식in. 2010년 4월 2일.
8) 최홍희(2005). 앞의 책 159쪽.
9) 정순천(2010). 앞의 글.
10) 태권도. 대한태권도협회. 2010년 6월호(165호). 107쪽.
11) 이날 회의 참석자는 미창사장 유화청, 청도관장 손덕성, 제3군관구사령관 최홍희, 연합참모총장 이형근, 국회부의장 조경규, 민의원 정대천, 정치신문사장 한창완, 정치신문주간 장경록, 공익통상부사장 홍순호, 후좌본사주간 고광래, 청도관 사범 현종명 등이다.
12) 최홍희(2005). 앞의 책. 160∼161쪽.
13) 최홍희는 “태권도를 창시하기 위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과 술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태권도가 탄생한 1955년 4월 11일 저녁은 내 기쁨이자 그 어떤 말로나 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다”고 밝혔다. 최홍희(2005). 앞의 책. 162쪽.
14) 이 내용은 서성원(2007). 개정판『태권도현대사와 길동무하다』. 도서출판 상아기획. 248∼251쪽에 잘 나와 있다. 이경명은 자신이 저술한 『태권도 용어정보사전』에서 “그의 주도로 구성된 명칭 제정위원회(실은 대한당수도회 청도관 고문회)에서 태권도의 명칭이 가결되자 이승만 대통령에게 태권도의 휘호 작성을 여러 차례 건의하여 1955년 4월 11일 ‘태권도’ 휘호를 받았다고 한다(기념사진 자료에 의하면 회의날짜는 1955년 12월 19일임). 그러나 회의일자 및 태권도 휘호는 친필이 아니라는 설이 지배적이다”고 밝혔다.
15) 무카스. 2010년 10월 12일. 이경명은 ‘최홍희와 태권도 명칭제정일’ 제목의 칼럼에서 최홍희의 헛된 공명심과 허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16) 이경명 인터뷰. 2011년 12월 22일. 이에 대한 글은 이경명(2002)이 저술한 『태권도문화의 뿌리를 찾아서-태권도의 어제와 오늘』(어문각)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17) 이 기사에 따르면, 최홍희가 제안한 ‘태권’ 명칭에 대해 유화청 사장이 전적으로 찬동하면서도 국가의 무도명을 개칭하는 문제는 여러 사학자들과 학계의 고찰을 거쳐야 하고 마지막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곧이어 3인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1955년 12월 31일까지 완료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8) 이경명 인터뷰. 2011년 12월 22일. 이경명은 “1955년 4월은 이기붕 밀가루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한달동안 정간(停刊)을 했다”고 말했다.
19) 정순천의 이 같은 주장은 2005년 12월 27일 정순천이 운영하고 있는 ITF태권도연구소, ‘밖에서 본 태권도사 – 태권도 명칭의 기원’을 참조했다. 이경명은 정순천에 대해 “최홍희를 신봉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20) 이경명 칼럼. 최홍희의 국부와 태권도 우남 휘호. 무카스. 2010년 10월 6일. 이 내용은 이경명(2002). 『태권도의 어제와 오늘』어문각에도 잘 나와 있다.
21) 네이버 지식in. 2009년 1월 27일. 정순천은 이 글을 2006년 4월에 썼다. 정순천은 2005년 12월부터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ITF태권도연구소에 수록해 놓고 있다.
22) 태권도. 대한태권도협회. 2010년 6월호(165호). 107쪽.
23) 네이버 지식in. 2009년 1월 27일.
24)이호성(2007). 한국무술 미 대륙 정복하다. 한국학술정보(주). 92쪽.
25) 부산일보. 2009년 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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