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 이 기사는 서성원 기자가 현장에서 취재-작성한 것으로, 대한태권도협회가 발간하는 <태권도> 잡지 2020년 9-10월호에 전문이 있습니다. 대한태권도협회 승낙을 얻어 싣습니다.


박해만 원로는 193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평소 무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해방이 되고 정국이 어수선하던 1947년 서울 종로에 있는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권법부에 들어가 윤병인 사범에게 무술을 배웠다.

그러던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난 후 그 해 11월 서울이 수복되자 스무 살이 안 되었지만 입대했다. 당시 서울에 있던 청년들은 징집 대상이어서 대부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대를 해야 했다. 박해만 원로도 징집 되어 열차를 타고 나흘 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그 때 그는 태권도 동반자와 후원자 역할을 해준 ‘귀인(貴人)’을 만난다. 바로 엄운규 원로(청도관 3개 관장·2017년 타계)였다.

박 원로는 1940년대 후반, 엄 원로와 비슷한 시기에 서울에서 무술을 연마했지만 서로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부산에서 잠깐 만난 후 1952년 대구 61통신운영대대에서 다시 만났다. 그 때부터 두 사람의 ‘태권도 동반자’ 여정이 시작됐다.

그 부대에 권투, 배구와 함께 태권도부가 생겨 박 원로는 10여 명의 부대원들과 함께 태권도를 수련했다. 그 때 엄 원로가 태권도 지도사범이었다. 두 사람은 계급이 같은 중사였지만 박 원로는 엄 원로를 스승처럼 믿고 따랐다.

태권도를 배우는 부대원들은 대부분 초보자였다. 입대 전 민간도장에서 무술을 배운 박 원로는 그들에게 기본 동작을 가르쳐 주곤 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본 엄 원로는 그에게 애정을 보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무술 이론과 실기를 박 원로에게 전수했다.

같은 부대에 복무할 때 박 원로는 자신을 이끌어준 엄 원로와 함께 부대 인근 대구 남산국민학교 강당에서 무술 연무시범을 했다. 그 때 두 사람은 기본동작부터 낙법, 앉아 겨루기, 단도 겨루기 등을 했다. 그는 지도사범인 엄 원로가 유급자인 자신을 시연의 파트너로 인정해주는 것에 감동했다. 그 후 박 원로는 관(館)이 달랐지만 엄 원로를 형처럼 스승처럼 믿고 의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 원로는 육군통신학교 교장을 따라 제1군 사령부로 전출을 가게 되었다. 엄 원로는 그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부대 규정상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당시 그는 미군에게 교육을 받고 특수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다른 부대로 전출이 불가했다. 두 사람은 또 헤어졌다.

박 원로는 전쟁이 끝나고 통신 중계소 선임하사가 됐다. 1200미터 고지로 발령을 받아 복무를 하던 중 장기휴가를 받은 그가 향한 곳은 고향집이 아니었다. 바로 엄 원로가 있는 1군 사령부였다. 그만큼 엄 원로는 보고 싶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박 원로를 만난 엄 원로는 친동생처럼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그 곳에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부대원들에게 틈틈이 태권도를 가르치며 엄 원로에게 기술을 전수 받았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 분은 나보다 4살이 많았지만 늘 스승 같았어요. 우리는 입대 전 비슷한 시기에 무술을 배웠지만 그 분은 나보다 이론과 실기가 뛰어 났어요. 유급자였던 내가 배울 게 참 많았죠. 그런 내가 그 분에게 사랑을 많아 받고 있다고 생각했죠.”

부대가 달라 또 헤어졌던 두 사람은 1954년 봄, 전라도 광주에서 다시 만났다. 광주 상무대에서 6개월 정도 함께 복무한 후 엄 원로는 서울 용산에 있는 6관구 통신부대로 갔다.

박 원로는 1955년 10월 제대를 하자마자 엄 원로를 찾아갔다. 당시 태권도계는 중앙본관에서 분리되어 생긴 ‘신흥관’이 태동하고 있었다. 강덕원·한무관·정도관·오도관이 대표적인데, 박 원로는 엄 원로가 소속되어 있는 청도관에 들어갔다.

그 시기 엄 원로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다. 이에 대해 그는 “경기고에 다니던 김승규 학생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태권도부를 만들어 달라고 엄 관장님에게 강사 요청을 해 와서 생도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엄 원로가 생도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칠 때 옆에서 보좌하며 주로 대련(對鍊)을 가르쳤다.

1950년대 후반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보고 있는 가운데 경무대 뜰에서 박해만 원로(왼쪽)가 엄운규 원로와 호신술을 하고 있다.

그리고 1950년대 후반, 경무대 뜰에서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지켜보는 가운데 엄 원로와 함께 태권도 시범을 보였다.

1961년 초 엄 원로가 청도관 3대 관장이 되자 박 원로는 수석사범이 됐다. 그는 군 장교들에게 호신술을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되어 1962년 청와대 무술교관이 되었다. 직급은 ‘5급 갑’이었다. 청와대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근무하면서 퇴근 후에는 청도관에 들러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후 1967년 대한태권도협회가 구성한 품세(品勢) 제정위원회 위원이 되어 품세 제정과 용어정립에 이바지했다. 당시 품새제정위원회는 각 관의 대표자가 참여했다. 위원장은 이종우(지도관)가 맡고, 곽근식(청도관)·이영섭(송무관·이교윤(한무관)·박해만(청도관)·김순배(창무관) 등이 유단자 품세와 팔괘 품세를 만들었다.

1960년대 후반, 품세제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던 당시의 박해만 원로

박 원로는 이와 관련된 비화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주었다.

“1960년대 후반까지 태권도계는 일본 가라테 형(形)을 수련하고 심사를 봤어요. 각 관(館) 의 도장에선 주로 유급자 형인 태극과 평안을 많이 했죠. 이 형의 특징은 연무선(품세선)이 ‘工(지을공)’이었어요. 품세제정위원들에게 각자 품세를 만들어 오라고 했는데, 가라테 형을 배웠기 때문에 그것을 모방해 만들어 왔죠. 품세선도 ‘공(工)’에서 벗어나지 못했죠. 당시 위원장이었던 이종우 관장은 가라테 형에 태극이 있기 때문에 태극이라고 할 수 없어 태극에 있는 팔괘를 따서 팔괘라고 했는데, 머리가 참 좋았어요. 그런데 품세 동작이 팔괘 품세선, 팔괘 뜻과 동작이 맞지 않았어요. 기본동작을 품세선에 맞춰 공방(攻防)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거죠.”

그는 유급자용으로 만든 팔괘 품세의 문제를 지적하며 “나는 제정 위원 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렸지만 5개를 만들어 그 중 2개가 채택됐다. 그것이 팔괘 3장과 5장”이라며 “팔괘 중 어려운 것은 고려, 태백 등 이름을 붙여 유단자 품세를 만들어 17개 품세를 제정했다. 1975년 내가 만든 팔괘 5장은 유급자(자띠)들이 했는데 구성이 어렵다고 해서 팔괘 8장이 됐다.”고 설명했다.

2016년 투병 중인 엄운규 원로와 함께 있는 박해만 원로(왼쪽). 가운데 사진은 박해만 원로 품새 지도 모습

이런 가운데, 2017년 6월 엄 원로가 타계했다. 그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고인의 장례는 국기원·세계태권도연맹·대한태권도협회·태권도진흥재단 등 태권도 단체가 함께 ‘태권도장(跆拳道葬)’으로 치렀다.

그는 “나에게 태권도를 가르친 스승이었다. 태권도 실력도 나보다 뛰어났고, 행정능력과 인품을 본받을 것이 참 많은 분이었다.”고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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